국난 극복 대한민국 복원력 믿고
제왕적 대통령제 종식 계기로
온건 합리주의가 설 땅 확보해야
얼마 전 칼을 함부로 휘두르다가 자르려던 빵은 공중으로 휙 날아가고 멀쩡한 손가락의 옆구리 살이 포 뜨듯 잘렸다. 피 흐르는 손가락을 동여 싸매고 달려간 병원에서 7바늘이나 꿰매는 작은 사고가 있었다. 살이 다 잘려 나갈 뻔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끝자락이 달랑달랑 달려 있으니 일단 봉합하고 붙는지 기다려 보자고 한다. 괴사할 수도 있으니 금주는 물론이고 물 닿게 하지 말고 수시로 소독하고 약 바르고 공기 통하게 해야 한다고 주의를 단단히 주었다. 신줏단지처럼 상처가 난 손가락을 잘 보살핀 덕분에 찢겨나간 살이 잘 붙고 있다. 잘린 살이 붙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바로 우리 신체의 복원력이다.
아물어 가는 손가락의 상처를 보면서 희망을 느낀다. 우리의 몸도 그럴진대 우리나라의 상처도 아물지 않겠는가. 모든 불행 속에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축복이 숨어 있다고 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역경을 이겨내는 복원력이 대단한 나라 아닌가. 수천 년 중화질서 속에서도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왔고, 왜란으로부터 나라를 구했고, 식민지와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이루었고 서슬 퍼런 군부독재도 물리쳤고 외환 경제위기를 극복한 복원력의 역사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다만 그 많은 역경 속에서 문드러졌던 민중의 아픔과 국가적인 비용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자유민주주의의 성공사례로 세계사에 이름 올린 작금의 대한민국에 이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일이 벌어질 줄을. 잘못 빼든 칼, 마구 휘두른 칼날에 우리나라가 휘청거리고 있고 보수와 진보를 떠나 모든 국민이 깊은 상처를 받았다. 이제 이 상처에 대한 응급처치뿐 아니라 궁극적 치유로 가는 처방이 필요하다. 복원력이 제대로 작동해 더 국력 낭비를 방지하려면 그 이전 상태로의 복원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이전의 상태보다 더 강한 체질로 바꾸는 처방이 있어야 하겠다. 우리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뒤통수를 맞고 넘어졌다는 사실은 번복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넘어졌는가. 그렇다면 땅에서 무엇을 주워야 할지 생각해보라”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말처럼 넘어져 생긴 상처를 보상받고도 남을 만한 것을 주어서 일어서야 한다.
무엇을 갖고 일어서야 하나. 제왕적 대통령제의 종식이다. 이번 사태를 대통령 개인의 일탈로만 볼 수 없다. 개인적 일탈이 이리 무시무시한 사태로 폭발되지 않도록 하려면 5년 단임 기간에 절대적 권력을 무소불위의 무기로 삼아 휘두르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이번 계기에 바꾸어야 한다. 단시간 내 중임제 또는 내각제 등 대안에 합의를 이루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최소한 제왕적 대통령제의 종식을 위한 개헌을 향한 로드맵을 들고 일어서야 할 것이다.
아울러 온건 합리주의자들이 설 땅을 확보해야 한다. 사고의 양극화는 세계적 추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조선시대 원리주의, 식민지 시대의 친일반일 대립, 광복 후 좌우투쟁 및 군부독재 등 유산이 혼재하면서 극단주의자만이 소속 집단을 대변하고 온건 합리주의자들의 설 곳이 없어진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고 이번 사태의 근원 중 하나다. 극단적 이념과 프레임 정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합리적 사고와 타협의 정치를 지지하는 정치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이번의 국가적 위기가 전화위복이 되기 위해서는 여야를 떠나 모두가 나라의 미래를 위한 진지한 로드맵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국가와 국민의 미래보다 차기 정권 쟁취를 위한 표 계산만 정치인들의 머리에 가득한 것 같아 걱정이 앞선다. 그럼에도 베인 손가락의 치유력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강한 복원력에 대한 믿음을 보낸다. 비가 쏟아졌으니 무지개가 뜰 것이다.
박은하 전 주영국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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