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적 취득한 압둘 와합씨
한국에 온 시리아 ‘1호’ 유학생으로 2020년 한국 국적을 취득한 압둘 와합(40)씨는 지난 한 주간 자신의 두 조국이 숨 가쁜 변화를 맞는 모습을 지켜봤다. 한국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갑자기 계엄 선포를 하면서 큰 혼란이 발생했고 2011년 ‘아랍의 봄(중동 민주화 시위)’ 이후 내전에 휘말렸던 시리아에선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가 반군에게 축출됐다. 지난 8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와합씨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혹시 꿈이 아닐까, 깨지는 않을까 싶어 편히 잠도 못 잔다”고 했다. 시리아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딴 후 “(시리아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의 따뜻함과 성실함이 좋아서” 2009년 한국 유학을 선택했던 와합씨는 동국대에서 법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지금은 시리아 난민을 돕는 단체 ‘헬프시리아’의 대표를 맡고 있다.
-유학 당시 한국에서 평생 살 결심이었나.
“전혀 아니다. 2009년 한국에 와 대학원에서 학업을 마치고 시리아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한국에 온 뒤 2년 만에 (’아랍의 봄’) 혁명이 일어났다. 당시 알아사드 정권을 비판하는 활동을 하며 언론에 노출됐고, 시리아 정부는 저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내전은 하루하루 길어졌고, 한국에서 오래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귀화를 결심했다.”
-지난 한 주 한국과 시리아에서 발생한 큰 변화를 보며 무엇을 느꼈나.
“두 나라가 모두 어려운 시기라고 생각한다. 긴장되고 힘들다. 한국과 시리아 뉴스를 오가면서 모두 실시간으로 보았다. (사실상 무정부 상태인) 시리아와 비교하면 한국은 평화로운 편이다. 며칠 전에는 한국인들이 어떻게 이 상황을 대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여의도 광장에 갔다. 눈물이 나더라.”
-왜 눈물이 나나.
“시위 현장에서 ‘아파트’ 노래를 부르면서도 정치적으로 원하는 목소리는 내고 있더라. 질서 있는 시위가 감동적이었다. 낭만적으로도 보였다.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리면서 싸워야 하는 시리아와 비교할 때 한국은 위기를 다루는 방식 자체가 민주적이고 평화적으로 보였다. 끝까지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9일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본지와 만난 시리아 출신 귀화인 압둘 와합씨. /고운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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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독재 정권의 갑작스러운 붕괴를 보고 어떤 기분이 들었나.
“반군이 수도로 진격을 시작한 11월 말부터 실시간 뉴스를 계속 지켜봤다. 지난 8일 새벽, 뉴스를 보다가 깜박 잠들었는데 깨어나 TV를 보니 내가 다니던 다마스쿠스대에 반군 깃발이 꽂혀 있는 모습이 중계되고 있더라. 한국 국적을 취득했을 때보다 더 기뻤다. 아직 꿈인지 현실인지 믿기지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은 안 되나.
“독재 정권의 붕괴는 무조건 좋은 일이다. 그들은 민가를 폭격하고, 조금이라도 정권에 반(反)하는 정치적 발언을 하면 체포해 갔다. 50여 년간 국민을 억압하고 살해한 잔인한 정권이다. 무조건 교체돼야만 했다. 앞으로 여러 (반군) 세력이 크고 작은 전투를 하겠지만 이들이 알아사드 같은 철권통치를 답습하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아버지에 이어 2000년 대통령직을 세습해 53년간 부자(父子) 독재를 한 알아사드 정권이 무너진 후인 8일 반군과 시민들은 다마스쿠스에 있는 악명 높은 세드나야 감옥을 부수고 독재 정권이 철권통치를 하며 잡아 가둔 수감자들을 풀어줬다. 감옥 문이 열리자 비인간적인 고문과 살상의 흔적이 드러났다. 와합씨는 “가족 중에도 영문 모르고 감옥에 끌려가 고초를 당한 이들이 여럿 있다. 한국에 있는 내가 반정부 목소리를 냈다는 것도 가족이 고초를 당한 이유 중 하나였다”고 했다.
-세드나야 감옥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나.
“수감자들이 풀려나면서 소문만 무성했던 알아사드 정권의 잔혹함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레바논 국적의 한 50대 남성은 여덟 살 때 하페즈 알아사드(바샤르 알아사드의 아버지) 전 대통령의 동상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40여 년을 갇혀 있어, (9일 풀려났을 때) 2000년 집권한 바샤르 알아사드를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 열여덟 살 때 홀몸으로 체포당한 30대 여성은 아이 셋과 함께 나왔다. 성폭행을 당해 낳은 자식으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한다. 인권 활동가들은 이런 범죄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
-가족은 어떤 어려움을 겪었나.
“나는 ‘아랍의 봄’ 때 한국에 있으면서 알아사드 정부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이후 시리아 정부로부터 회유와 압박을 번갈아 당했다. 2016년 삼촌이 내 여권을 연장받으러 다마스쿠스에 갔다가 구금당했고, 그를 찾으러 간 다른 삼촌도 함께 끌려갔다. 아무 정치 활동도 하지 않은 분들이다. 시리아 정보기관이 나에게 연락을 해와 ‘삼촌을 살리고 싶으면 시리아로 돌아오라’고 했지만, 서울 친구들이 ‘너도 죽고 삼촌들도 죽일 것’이라고 만류해 한국에 머물렀다.(삼촌들은 3개월 후에 풀려났다고 한다.) 그때 한국 국적을 취득하자고 마음먹었다.”
-다른 가족은 지금 어떻게 지내나.
“나는 팔 남매 중 장남이다. 나머지 가족은 모두 난민 신분으로 해외로 피란 갔다.(2011년 ‘아랍의 봄’ 이후 내전이 심해지면서 600만명이 넘는 시리아 국민이 나라를 떠났다.) 두 남동생은 노르웨이에, 부모님과 여동생 셋 그리고 남동생 둘은 튀르키예에 있다. 고향 라카는 (이번에 알아사드를 몰아낸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 반군이 아닌) 쿠르드족 반군이 점령하고 있어 바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 같다.”
-앞으로 시리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권이 무너졌기 때문에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정권 타도를 위해 연합했던 반군 세력의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미지수다. 알아사드 정권의 붕괴는 ‘첫 단추’에 불과하다.”
-시리아보다 더한 인권 탄압국인 북한도 언젠가 변할까.
“나는 스물여섯 살까지 독재 권력 밑에 살다가 한국에 왔다. 독재자 밑에서 억압받으며 사는 국민의 아픔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런 시리아보다 몇 배 더 심한 나라가 북한이다. 그곳의 주민들이 걱정된다. 인권을 보호하는 정권이 들어서서 더는 그런 아픔을 겪지 않고 해방됐으면 좋겠다. 국민을 ‘짐승’처럼 여기는 정권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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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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