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색하는 유럽 “망명 절차 중단”
10일(현지시각) 튀르키예 남부 하타이주(州)의 튀르키예·시리아 국경 검문소 입구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폭정을 피해 튀르키예로 피신했던 시리아 난민들이다. 알아사드 정권이 축출되면서 튀르키예 등 주변국과 유럽에 머물고 있던 시리아인 상당수가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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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리옹에서 11년째 망명 생활 중인 시리아 출신 사미르 알하산(35)씨는 11일 짐을 싸고 있었다. 튀르키예 남부 하타이까지 비행기로 가서, 다시 육로로 시리아 북부로 향하는 사흘 여정을 준비하는 그는 본지에 “고향에 가서 친척들을 만나고 아버지의 집과 공장도 멀쩡한지 둘러보려고 한다”고 했다.
북부 알레포 인근에서 비누 공장을 운영하던 그의 부모는 2013년 시리아 내전 와중에 모두 사망했다. 반(反)정부 활동에 연루돼 수배됐던 형도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사미르씨 혼자 시리아를 떠나 프랑스에 왔다. 그는 “유럽에 어렵사리 정착했지만 삶의 여건이 좋다고는 할 수 없다”며 “시리아로 영구 귀국이 가능한 상황인지 이번에 가서 보려고 한다”고 했다.
오랜 내전과 독재를 피해 해외로 탈출했던 시리아 난민 중 상당수가 반군에 의한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축출 이후 고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은 이날 “레바논과 튀르키예 등에선 시리아로 돌아가는 피란민의 행렬이 펼쳐지는 중”이라며 “유럽에서도 귀국을 고려하는 이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픽=김하경 |
유엔이 추정하는 시리아 난민의 수는 630만명 이상이다. 튀르키예·레바논 등 인접 국가에 400만명 가까이 몰렸고, 독일 100만명(유엔 집계는 72만명)을 비롯해 오스트리아(11만), 스웨덴(11만), 네덜란드(7만) 등 유럽에도 130만~150만명이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상당수가 해외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기보다 고향으로 돌아가 새 기회를 모색하려 한다고 알려졌다. 최근 중동 난민에 대한 시선이 나빠지고, 각종 혜택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라 더 그렇다. WSJ는 독일 거주 시리아인들의 말을 빌려 “유럽 정착에 성공한 이들 사이에선 ‘아직은 아니다’라면서도 ‘시리아의 치안과 경제 상황이 충분히 개선되면 귀국을 고려해 보겠다’는 의견들이 나온다”고 전했다.
유럽은 난민 문제를 해소할 기회라며 반색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전쟁과 박해 등으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에게 폭넓게 망명을 인정해 왔다. 이것이 난민 급증으로 이어졌고 사회적 갈등도 깊어졌다. 종교와 생활 방식이 충돌하며 사건·사고가 줄을 잇고, 난민에게 주는 주거·생활 보조금을 두고 기존 유럽 시민들의 불만도 폭증했다. 이는 유럽 전역에서 극우 정치 세력이 힘을 얻는 계기가 됐다.
시리아와 레바논 동부를 잇는 알마스나 국경에서 레바논의 시리아인들이 줄을 서서 시리아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AF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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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거주 난민 중 시리아 출신의 비중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100만명이 유럽으로 몰려든 2015년 난민 위기 땐 전체의 절반이 시리아 출신이었다. 이런 와중에 알아사드 정권 붕괴로 시리아 정세가 안정될 가능성이 커지자 난민에 대한 ‘장벽’을 높일 명분이 생긴 것이다.
독일·영국·프랑스 등 서유럽국 및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등 북유럽국들은 지난 9일 일제히 “시리아 피란민의 망명 절차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오스트리아는 “이미 허가한 망명 자격도 재검토한다”는 입장이다. 독일 중도 보수 기독민주당(CDU)은 “시리아행 전세기를 띄우고 정착 비용으로 1000유로(약 151만원)씩 지급하자”는 독려책도 내놨다.
튀르키예도 난민들의 귀국 문을 활짝 열었다. 튀르키예에선 350만명의 시리아 난민이 머물면서 각종 갈등과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려 튀르키예가 시리아 반군을 지원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9일 “시리아 난민들의 귀국을 돕기 위해 2013년 차량 폭탄 테러 사건 이후 폐쇄했던 야일라다이 국경 검문소를 재개방키로 했다”고 밝혔다.
현재 한국에도 1200~1300명의 시리아 난민이 체류 중이다. 이 중 난민 자격을 인정받은 이들은 10명이 채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부분은 정치적 박해나 재난 등으로 귀국할 수 없는 상황을 고려해 출국을 유예해 주는 ‘인도적 체류자’ 자격이다. 현재의 정치적 불안 상황이 종식되면 돌려 보낸다는 것이 제도의 취지다.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2600여 명의 인도적 체류자 중 약 48%가 시리아인이다.
알아사드를 몰아내고 정부를 구성 중인 시리아 반군 측은 해외 난민에게 “조국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고 있다.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이 주축이 된 시리아 반군은 9일 해외의 시리아인들에게 “돌아와 미래를 건설하는 데 기여해 달라. 새로운 시리아는 존엄과 정의, 국민의 열망을 반영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
알아사드를 몰아내고 정부를 구성 중인 HTS 측은 10일 ‘시리아구원정부(SSG)’의 수장 무함마드 알바시르(41)를 새 과도정부 총리로 추대하고 본격적인 정권 인수 작업을 시작했다. SSG는 HTS의 행정 조직으로 2017년부터 북서부 이들리브주(州)를 통치해왔다. 알아사드 정부의 무함마드 알잘랄리 총리는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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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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