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서울역에서 시민들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승리 선언 방송을 보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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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선 | 가수·밴드 ‘양반들’ 리더
우리는 트럼프의 시대를 살고 있다. 8년 전에 처음 출마했을 때는 이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번의 대선을 거치면서 트럼프의 파시즘은 주류가 되었다. 폭동과 테러, 폭력과 혐오가 미국 민주주의를 정의한다. 트럼프는 공포, 해리스는 희망을 강조했지만 결국 상대를 헐뜯고 국민을 분열시킨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다. 서로를 비방하면서 세력을 결집한다. 오늘날 미국 민주주의는 레드와 블루로 철저히 이분화되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어느 공연 기획자의 전화를 받았다. “혹시 범선씨 어느 쪽이세요?” 양반들 1집 홍보를 위해 한 대기업이 운영하는 공연장 쪽과 협의하던 중 내가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윗선에서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나는 민주당도 국민의힘도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한겨레에 칼럼을 기고하기 때문에 왼쪽이라는 것이다. 내가 여태껏 쓴 칼럼을 읽어본다면 민주당 지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무릇 정치란 왼쪽 아니면 오른쪽, 여당 아니면 야당이고, 한겨레는 지금 분명 왼쪽, 야당이라는 논리다.
민주주의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1789년 프랑스혁명 당시 국회 왼쪽에는 혁명 지지자, 오른쪽에는 앙시앵레짐 지지자가 앉았다. 그렇게 좌우, 진보와 보수가 구분되었고 20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민주주의란 사실상 둘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게임이다. 모든 백성이 주인이라는 뜻이지만 그것은 허상이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4, 5년에 한번씩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투표를 해서 선장을 고른다. 앞으로 나아가되 어떤 방향과 속도로 나아갈지를 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성장과 진보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는 괜찮다. 결국 다 같이 나아진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으면 민주주의는 건강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 깨지면 위기에 빠진다.
오늘날 미국을 위시한 서방세계가 그러하다. 공동체가 붕괴되었다. 경제는 양극화되고 정체성 정치는 갈등을 부추긴다. 한배를 타고 있다는 믿음이 없다. 각자도생이다. 트럼프와 해리스는 서로 상대가 당선되면 민주주의가 끝난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 말은 상대편 지지층은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둘 다 50%에 가까운 득표를 했다. 미국이 내전 위기라는 진단은 여기에서 온다. 2021년 국회의사당 폭동 같은 사태가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북극성과도 같은 미국이 빛을 잃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는 구호는 미국 우선주의다. 더 이상 민주주의 진영의 큰형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미국만 바라보고 달려왔다. 미국처럼 되기 위해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과업을 반세기 만에 달성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미국이 갈팡질팡한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이기 전에 뼛속까지 왕도 정치를 추구하는 군자의 나라다. 그래서 정치인뿐만 아니라 연예인에게까지도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민다. 대통령이 잘못하면 탄핵도 하고 감옥에도 보낸다. 미국은 역사상 최초로 형사 처벌을 받은 대통령을 감옥에 보내기는커녕 재임시켰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도 그가 도덕적으로 훌륭하다고 믿지는 않는다. 민주당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애초에 민주주의는 성인군자를 뽑는 콘테스트가 아니다. 주어진 둘 중에 차악을 택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한배를 탔다는 공동체 의식, 그리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희망이 있으면 괜찮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앞으로만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지금 그러한 사회적 합의가 깨졌다. 반반 갈라져서 서로의 방향은 퇴보이거나 침몰이라고 싸운다.
그렇다면 미국만 보고 다 같이 영차 영차 나아가던 대한민국호는 어디로 갈 것인가? 트럼프가 다시 우리에게 강요할 것이다. 너희 나라 일은 너희가 알아서 하라. 주한미군 주둔비도 너희가 내라. 더 이상 민주주의의 리더가 아니라 불안하고 불만 많은 불량배다. 그렇다고 옛날처럼 일본이나 중국을 따라갈 수도 없다. 우리는 이제 미국을 졸업하고 제 갈 길을 찾아야 한다.
내가 받았던 질문을 대한민국에 묻고 싶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 좌파인가 우파인가? 진보인가 보수인가? 미국인가 중국인가? 동양인가 서양인가? 나는 동학에서 답을 찾는다. 불연기연(不然其然). 아니기도 하고 그렇기도 하다. 둘 다 아니지만 둘 다다. 대한민국은 분열이 아닌 통일을 위해, 대동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아니다-그렇다’의 역설이 우리의 유일한 살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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