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2일 남태령 집회에 참여한 김후주씨. 김후주씨 제공 |
“향연님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남태령 나갔다가 너무 감명받아서 삶이 바뀌었어요.”
지난달 28일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광화문 집회 시민 발언이 끝난 뒤 행진하는 김후주(36)씨에게 한 시민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향연’은 김씨가 ‘엑스’(X·옛 트위터)에서 활동하는 이름이다. “소식 알려줘서 너무 고마워요”, “빨리 알려줘서 남태령에 갈 수 있었어요. 스피커가 돼줘서 감사해요.” 시민들은 응원의 말을 건네며 김씨의 손에 그들이 가진 모든 걸 마구 쥐여줬다. ‘응원봉’과 ‘농민’을 만나게 해준 그 끈을 계속 이어달라는 응원의 몸짓이었다.
지난달 22일 경찰과 28시간 넘는 대치 끝에 결국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가는 길을 연 1만여명(주최 쪽 추산) 시민들, 그들을 남태령으로 이끈 건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게시글이었다. 김씨는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행렬이 서울지하철 4호선 남태령역 부근에서 경찰 차벽에 가로막힌 상황을 먼저 알리고 시민 관심을 끈 인물이다. 충남 지역에서 배농사를 짓고 있지만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등 농민단체 소속은 아니다. 그저 10년 넘은 ‘엑스’ 이용자이고, ‘트친’(트위터 친구)들과 좋아하는 가수나 관심 있는 사회 문제를 두고 소소한 얘기를 나누던 청년 여성 농부였다. 하나의 게시글에서 1만명의 시민 연대와 승리가 이뤄질 수 있었던 과정을, 지난달 29일 김씨에게 전화로 들어봤다.
‘여러분, 국짐 장례식에서 제대로 된 상여행렬을 보고 싶으십니까?’ 시작은 김씨가 지난달 12일 자신의 엑스 계정에 올린 한 게시글이었다. ‘국짐’은 국민의짐을 줄인 말로 국민의힘을 가리키는 말이다. 시골 출신이자 농업인인 김씨는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뒤, 국민의힘에 대한 분노가 장례식 등 퍼포먼스로 분출되던 것을 보고 ‘상여투쟁’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 글은 이용자 사이에서 급격히 전파됐다. “미쳤다, 나 상여투쟁 보고 싶다”, “꼭 봐야겠다. 전농에 후원하겠다.” 당시 집회·시위 참여자들을 위한 기부나 후원도 늘고 있을 때였다. “‘밈’으로 소통하는 엑스 특성상 ‘상여투쟁’이라는 단어에 많이 흥미를 보였던 것 같아요.” 그는 농민단체 활동에 대한 이런 관심이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행진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고 확신했다. ‘상여투쟁’을 하고 예상치 못한 열렬한 호응을 얻게 된 전농도, 김씨에게 ‘엑스 홍보대사’를 맡겼다. 김씨는 트랙터 행진이 시작된 지난달 16일부터 현장을 전달받아 시시각각 글을 올렸다. 최고 조회수 400만회, 못해도 10만∼20만회를 기록하며 시민 관심이 계속된 이유다.
전봉준투쟁단 트랙터 남태령 대치
처음 알려 1만명 시민 연대 이끌어
충남에서 배농사 짓는 청년 농부
“시민연대 현장에서 보며 큰 감동
남태령 불꽃 어떻게 유지 고민 중
대첩의 모든 순간들 기록할 터”
트랙터 행진이 서울에 진입할 땐 전농 내부 긴장감도 고조됐다. “전농에선 당연히 진압될 거라 생각했고 ‘남태령까지 전방 4㎞’ 이런 식으로 상황을 전달해주더라고요.” 어김없이 행진은 남태령에서 막혔다. 김씨는 격렬한 대치가 끝나 정체되기 시작한 당일 오후 1시 ‘여러분, 농민 트랙터가 서울의 길목에서 막혔다’는 글을 올렸다. 시민들은 곧바로 김씨에게 반응했다. “저 지금 수원에서 광화문 집회 가고 있었는데 지금 당장 남태령에서 내립니까?”, “당장 튀어갈게요.” 일부 시민은 오후부터 남태령으로 발길을 돌렸고, 다른 시민은 광화문 집회에서 트랙터를 기다렸다. 그 덕분인지 광화문 집회 발언자로 전농 의장이 올라서자, 누구보다 큰 격려의 박수가 쏟아지기도 했다. 이 시민들은 집회와 행진이 끝난 뒤 곧바로 남태령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28일 광화문 집회에서 시민 발언을 하는 김후주씨. 김후주씨 제공 |
남태령에 모인 ‘응원봉 부대’와 ‘농민’을 잇는 일종의 가교 구실을 한 김씨는 현장을 보며 큰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응원봉이 뭐냐”고 묻는 농민과 ‘농민가’를 모르는 응원봉 부대가 어색함을 풀고 서서히 섞여가는 모습이, 김씨에겐 시민연대의 시작점처럼 보였다. 특히 경찰 차벽을 뚫기 위해 연행을 불사하려 했던 농민들이 “경찰과 대치하지 않고 차벽이 풀릴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키겠다”고 결정한 것은 고무적이었다. “우리는 연행되면 끝이지만 이분들(응원봉 부대)이 온 이상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우리를 지켜주려 오셨는데 우리도 이분들을 지켜줘야 한다면서 긴 싸움을 선택한 거죠.” 끝내 경찰 차벽은 풀렸고, 시민연대는 ‘승리’ 했다.
“‘여러분, 여기 지금 농민 분들이 다쳤어요. 도와주세요’라고 글을 올렸을 때, 마치 아이가 길바닥에 넘어지면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가서 일으켜주는 식으로 촉발된 ‘연대’라고 생각해요.” ‘남태령 불꽃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로, 동덕여대로, 곳곳의 농성 현장으로 들불처럼 번지는’ 모습을 보며 김씨는 ‘그 이후’를 고민하고 있다. “단순히 온라인에서만 얘기하기보단, 실제 현장까지 나와 의견을 내고 들어보는 것이 건강한 공론장을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불꽃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이번 남태령 대첩의 모든 순간을 기록해보려고 해요.”
김가윤 기자 ga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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