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좌우합작위가 드러낸 극심한 이념 갈등
일러스트=한상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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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덕수궁에서 미소공동위원회(미소공위)가 시작되자, 미군정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남한 전역을 순회하며 ‘반공 연설’을 이어갔다. “공산주의는 무서운 전염병인 콜레라와 같다. 공산주의와는 타협도 협력도 불가능하다. 한국을 구원할 유일한 길은 신탁통치와 공산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하는 길뿐이다.” 그 시기 한국을 방문한 이승만의 오랜 동지 로버트 올리버 교수에게 하지 중장은 “이승만은 과대망상증으로 거의 정신이 나간 사람이다. ‘은밀히 면담해보라’고 이승만에게 정신과 의사를 소개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해 5월, 미소공위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무기 휴회에 들어간 이후에도 미국은 한국 문제를 모스크바협정의 틀 안에서 소련과 합의로 해결한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미국 국무부는 맥아더에게 훈령을 보내 미‧소 간 합의 도출에 걸림돌인 이승만과 김구 등 ‘늙은 망명객들’을 정계에서 퇴출시키고, 그 대신 ‘진보적 성향의 중도파 인사들’을 발탁‧지원하라고 지시했다. 그에 따라 하지와 그의 정치고문 버치 중위는 새로운 지도자들을 육성‧지원하려는 의도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버치의 조언에 따라 하지가 발탁한 인물은 김규식이었다. 미국 로어노크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승만과 함께 구미위원부에서 외교 독립운동을 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노력자대회’에 여운형과 함께 참석했고, 김원봉과 함께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해 주석이 되었다. 임시정부가 좌우 합작으로 재조직될 때 김구 주석에 이어 부주석에 올랐다. 영어에 능통했고, 성격이 온화하고 정치적 야심이 크지 않아 임정 계열의 우익이면서도 좌우 모두에 신망이 두터웠다.
미군정은 중도 우파 김규식과 중도 좌파 여운형을 앞세워 김구, 이승만 등 ‘극우’, 박헌영 등 ‘극좌’를 배제하고 ‘좌우 온건 세력’을 중심으로 정계를 개편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소련과 협상을 재개하려 했다. 이승만, 김구를 만난 하지는 그들에게 전면에 나서지 말고 뒤에서 김규식을 지원할 것을 요청했고 “나는 미군 사령관으로서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 합작 노력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좌우 합작은 성공할 수 없고, 설령 성공한다면 공산화뿐”이라는 신념을 지닌 이승만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한국에 가장 위험한 두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는데, 하지 장군과 버치 중위”라고 썼다.
일간지 『제3특보(第3特報)』 1946년 10월 28일자에 실린 시사만평. 여운형과 김규식이 악수를 나누고 있으며, 이들을 극좌와 극우 세력이 방해하는 것으로 풍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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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7월, 미군정의 지원을 배경으로 우익 계열 김규식, 안재홍, 원세훈 등 5명, 좌익 계열 여운형, 허헌, 이강국 등 5명, 총 10명의 대표가 참여하는 좌우합작위원회(합작위)가 조직되었다. 합작 원칙을 놓고 좌익의 ‘5원칙’, 우익의 ‘8원칙’을 절충해 진통 끝에 그해 10월 ‘좌우 합작 7원칙’에 합의했지만, 좌우 정치 세력 모두가 거부함으로써 현실 정치에는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합작위는 하지가 의도한 것처럼 남한 정치 세력을 통합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 자체가 독자적 정치 세력으로 한국민주당(한민당)을 대체해 미군정의 여당 지위를 확보했다. 합작위와 미군정은 10월 23일부터 11월 말까지 거의 매일 ‘조미공동회담’을 개최했다. 합작위 위원들과 미소공위 수석대표 브라운, 군정장관 러치 등 미군정 고위 인사들이 참여한 조미공동회담에서는 9월 총파업과 10월 민중 봉기 원인 규명, 친일 경찰 등용 문제 등 당면 문제가 깊이 있게 논의되었다. 이는 한국 정치 집단이 미군정과 ‘대등’하게 마주 앉아 정치 현안을 논의한 최초의 회담이었다.
미군정은 합작위의 요청에 따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 설치를 위한 선거를 실시했다. 입법의원은 정원을 90명으로 하고, 45명은 선거로 선출하고, 나머지 45명은 군정장관이 임명했다. 중추원 참의, 도‧부회의원, 칙임관(勅任官)급 이상의 지위에 있었던 자 등 친일 인사의 피선거권을 박탈했다. 합작위는 선거 절차를 제안했고, 각 도에 ‘선거감시위원’을 파견했다. 합작위 계열의 중도파 후보들은 규칙과 심판을 자신들이 정한 경기에 선수로 뛴 셈이었다.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독촉), 김구의 한국독립당(한독당), 김성수의 한민당 등 우익 정치 세력은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했지만, 좌익 정치 세력은 일제강점기 중추원과 다를 바 없는 허울뿐인 기구라고 비판하며 선거 참여를 거부했다. 10월 민중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한 상태에서 치러지는 바람에 좌익의 참여는 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1946년 12월 12일 중앙청에서 열린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에서 개회사를 읽는 김규식. 미군정은 이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다. /국사편찬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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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10월 20일부터 지역별로 선거일을 정해서 순차적으로 실시되었다. 미군정에서 확실한 규칙을 제시하지 않은 바람에 20세 이상의 주민들이 모두 투표할 수 있는 선거였지만, 지역에 따라 호주가 자기 가족 내의 유권자들을 대표하여 투표하는 일도 일어났다. 합작위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치러진 선거였지만, 선거 결과는 인민위원회 2명이 당선된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독촉, 한민당, 한독당 등 우익 정당 34명, 우익 성향 무소속 9명이 당선돼 우익 진영의 대승이었다.
11월 4일, 김규식은 ‘합작위 주석’ 자격으로 하지에게 선거 무효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유능한 애국자가 못 나왔고, 좌익 진영은 전면적 검거 때문에 피선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피선된 자가 극도로 편향적인 데다가 친일파라고 지목되는 자가 다수 당선된 것은 입법기구에 대해 전민중의 실망을 주었고, 충분히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 반민주적 선거라는 인상을 주었다. (…) 현명한 장군의 판단에 의해 민선(民選)을 전부 혹은 부분적으로 무효로 할 것을 요청한다.”
결과가 ‘편향적’이라는 이유에서 선거 무효를 요구하는 일은 세계 선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하지는 김규식의 요구를 받아들여 김성수, 장덕수, 김도연 등 한민당 핵심 인사 3인이 당선된 서울시, 독촉 인사 3인이 당선된 강원도 선거를 무효로 했다. 나아가 당선자의 ‘편향성’을 극복하겠다는 명분으로 관선의원 45명을 합작위가 추천한 ‘중립적’ 인사들로 선임했다. 관선의원에 선임된 인사 5명이 입법의원 참여를 거부했고, 한민당 소속 당선자 10여 명이 서울, 강원 선거 무효 조치에 반발해 등원을 거부해 12월 12일 개원식에는 재적 의원 90명 중 57명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미군정이 자신의 정책을 뒷받침할 일종의 ‘어용 기구’로 출범시킨 입법의원은 첫째 안건으로 미군정 정책에 정면으로 반하는 ‘신탁통치 반대 결의안’을 찬성 44표, 반대 1표의 압도적인 표차로 통과시켰다. 미군정으로서는 체면을 구긴 셈이었지만, 미군정의 한국 통치가 얼마나 ‘민주적’이었는지 역설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여성의원 4명. 여성운동의 성과로 찬사를 받았다. 왼쪽부터 박현숙, 박승호, 황신덕, 신의경 의원. /국사편찬위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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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로버트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비봉출판사, 2013
박태균, ‘버치 문서와 해방 정국’, 역사비평사, 2021
양동안, ‘대한민국 건국사’,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1998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 비전’, 청미디어, 2019
이정식,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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