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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9 (수)

[내삶의 기억] (1) 故성의영씨: 신앙심으로 살아온 101년 삶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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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모여 커다란 역사를 이룹니다. 조선비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내삶의 기억'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모든 삶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라는 기치아래 우리 부모님, 이웃 사람들의 삶을 기록할 것입니다. 또 특정 사건이나 특정 장소에 대한 여러 사람의 기억도 모아 역사로 남기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편집자]

고(故) 성의영 옹(翁)의 삶…‘가족과 신앙생활’이 전부였던 101년의 기록
자손 72명, "매순간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경기도 용인시에 거주하는 성낙도(62)씨는 2018년 2월 아버지 고(故) 성의영씨의 100세를 기념하기 위해 아버지 자서전을 냈다. 제목을 ‘아름다운 평신도 성의영 기억의 책’이라고 지었다. 사회적기업을 경영하는 조카의 자서전 출간 제안을 형제 4남4녀 모두 공감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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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영씨 자녀들이 만들어 출간한 아버지 자서전 ‘아름다운 평신도 성의영' 기억의책 표지사진. /사진=꿈틀제공




100권을 발간해 형제자매 등 가족 72명이 한 권씩 나눠 가졌다. 나머지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찾은 조문객 일부에게 돌아갔다. 많은 분들이 원했고, 부족한 자서전을 대신해 자서전 PDF파일을 휴대폰으로 전송하기도 했다. 성의영씨는 출간 1년 만인 올해 2월 자식들 곁을 떠났다.

지난 4월 초에 만난 고(故) 성의영씨의 막내 아들인 낙도씨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연신 눈물을 글썽거렸다. "당신이 실천한 것만 자식들에게 요구했어요"라며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성씨가 해병대를 전역한 20대 초반 때 일이다. 남다른 전우애 때문에 후배를 만나면 예정에 없이 늦기도 했다. 그럴때면 항상 공중전화로 "아버지 저 이러저러해서 늦게 들어갑니다"라며 집에 전화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더 늦기 전에 서둘러 공중전화를 찾아야만 했다.

후배들은 "형, 형 나이에 왜 허락을 받아요"라며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유가 있었다. 성씨 가족은 항상 저녁 가족예배를 했는데, 가족예배가 끝나도 집에 안 들어 온 자식이 있으면 아버지는 밤새 기다렸다. 대문과 현관문을 열어 놓고, 자식방에서 성경책을 보거나 기도를 했다. 성씨는 "그걸 알고 있는 자식들이 전화를 안 할 수 없었어요. 부모님을 존경 안 할 수가 없는 거에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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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성의영 씨 60대 초반 때의 모습.



낙도씨의 기억에 남은 아버지의 또다른 모습은 전형적인 ‘절약형’ 삶이었다. 성씨는 절약이란 써야 될 때도 안 쓰는 것이고, 검소는 필요한 데만 아껴서 쓰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과 가족에게는 엄격했지만, 이웃에게는 자상하고 후덕했다고 했다.

성씨가 중학생이었던 어느 날, 아버지는 조그마한 수퍼를 운영했다. 옆집에 살던 새댁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신랑이 집을 나가 안 들어온 지 6개월 정도 됐다고 했다. 출산하러 병원에 가야하는데 병원비를 빌리러 온 것이었다. 성씨는 어린 마음에 ‘빌려주면 못 받을 것 같은데 아버지가 빌려주실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얼마정도 필요한 지를 묻고는 바로 빌려줬다. 아버지 삶에서 보면 아까운 돈인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가족들이 보기에는 인색할 정도로 절약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쭤봤다. "아버지 받을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이거 받을려고 주냐? 꼭 필요하니깐 주지"라고 성씨는 또렷이 기억했다. 자식들 기억 속의 아버지의 삶은 교회와 가정에서 실천으로 보여주는 모범 그 자체였다.

다음은 성의영씨의 구술과 가족들의 진술을 토대로 저술한 자서전 ‘아름다운 평신도 성의영 기억의 책'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이다. 자서전의 서술시점 그대로 성의영씨 1인칭 시점으로 표현한다. 즉, 여기서 나는 고(故) 성의영씨다.

◆ "20리 학교 가는 길은 행복했다"

나는 일제강점기인 1918년 11월 21일(음력)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두포리에서 태어났다. 이미 두 아들을 자식으로 둔 아버지 성종호님과 어머님 김호순님 사이에 막내로 태어났다. 마을 주변의 산과 들에 밤나무가 많아 동네 사람들은 밤고지라고 불렀다. 집과 집 사이는 멀찍이 떨어져 있어 친인척 외에는 왕래가 거의 없는 작고 조용한 시골이었다.

나는 막내라서 부모의 각별한 사랑을 많이 받았다. 나는 형들과 달리 보통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형들은 오늘날 운수업이라 할 수 있는 마부를 하고 있어서 가정형편이 크게 어렵지도 않았다.

동네에서 보통학교에 다니는 아이는 손에 꼽았다. 파평보통학교(4년제)를 마치고 문산보통학교(6년제)에 진학해 2년을 더 공부했다. 매일 왕복 40리 거리를 4시간 걸어다녔다. 새벽 일찍 집을 나서 해질녘 돌아오면 온몸이 녹초가 됐다. 돌이켜보면 학교에서 공부했던 것보다 학교를 오갔던 길이 더 뚜렷이 기억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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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영씨가 회갑 때 아내 남상순과 찍은 사진.




◆ 결혼 후 장사 시작…"돈버는 재미에 푹 빠져 욕심내다 사기도 당해"

나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일을 도왔다. 하루하루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 사촌 형들이 집에 와서 들려주는 서울 이야기에 더 넓은 세상에 나가고 싶었다. 서울에 가서 장사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아무런 경험도 대책도 없었지만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서울 포목도매상을 찾아가 포목을 받아 행상을 했다. 어설프게 장사하는데도 잘 팔려 신기했다.

한 푼 두 푼 돈을 벌다 보니 장사가 재밌었고, 서울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았다. 점차 서울이 눈에 익으니 다른 곳은 어떨지 궁금했다. 우연한 기회에 기차를 타고 장사하러 함흥까지 가기도 했다.

1939년 10월 20일 스무살 나이에 결혼했다. 사촌 누이가 고향 마을 인근 파주군 전곡리의 처자를 중매해 부부의 연을 맺은 것이다. 신혼살림은 고향인 파주군 두포리에 차렸다. 아내 남상순은 결혼 당시 한창 젊음의 꽃을 피울 열일곱살이었다. 내가 그 당시 예수를 믿었다면 아내에게 이렇게 고백했으리라.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아가서 1:15)"

결혼 후 다시 장사하러 집을 떠났다. 가정을 꾸렸으니 더 큰 이문을 남기고 싶었다. 하지만 욕심이 화근이 됐는지 노름꾼에게 사기를 당했다. 함흥에서 장사할 때다. 이익을 많이 남기게 해 주겠다는 말에 꼬여 가진 돈 전부를 줬는데 그 사기꾼은 종적을 감췄다. 돈을 잃고 집에 돌아가려 하니 아내 보기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 뒤로 청진에 가서 화장품, 바느질 기구, 참빗, 안경 등을 팔며 돈을 모았다.

◆ "신앙심 하나로 견뎌낸 시간들"…일제 강제징용에 끌려가

청진에서 장사하다 다른 곳도 구경하고 싶어 북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그러다 두만강 건너 도문까지 갔다. 당시 도문은 동북아 교통의 요충지였다.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도문에서 안경장사를 하다 만난 김경조라는 친구를 따라 부흥사경회라는 것에 가게되었다. 김익두 목사의 설교에 나는 감동 감복하여 그날부터 예수님을 평생 구주로 모시게 되었다.

도문에서 지낸지 1년이 지났을 때,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소문이 났다. 그래서 4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장사를 그만 두고 초보 농사꾼으로 고향 파주로 돌아온 지 2년째 되던 1945년 3월, 나는 일제의 강제징용에 동원됐다. 일본 나가사키현에 있는 동광으로 끌려갔는데 광물 채집이 잘 안되니 다른 잡일을 많이 시켰다.

끼니때마다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등겨가 섞인 보리밥을 배급받았다. 해방을 맞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고국으로 돌아갈 일이 막막했다. 나는 징용자들 중 가장 많이 배운 편이고, 일본어도 할 줄 알아 귀국 방법을 여기저기 알아봤다.

돈만 주면 배를 구할 수 있었다. 같은 해 10월에 배편을 마련해 함께 갔던 사람들과 귀국할 수 있었다. 나는 다행히 몸 상한 곳 없이 돌아왔다.

◆ 소를 팔아 집 앞에 교회 세워

징용 때를 제외하고 집에서 30리가 넘는 문산교회에 다녔다. 고향 마을에는 교회가 없었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고사하고 어렴풋이 예수교에 대해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주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아내와 딸을 데리고 교회에 갔다. 나의 신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동네사람들의 조롱을 받았으며, 아버님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하지만 나중에는 어머님이나 아버님 모두 나의 종교를 따라 같이 예수님을 믿고, 믿음 속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문산교회까지는 거리가 멀어 힘들기도 했지만, 우리 마을에 교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궁금해서라도 기웃거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 파평국민학교 이형일 교장선생님의 도움으로 큰형님 댁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주일이면 친인척이며 가까운 이웃을 큰댁 사랑방에 모이게 해 예배를 이끌었다. 그중에는 새 사람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늘 곰방대를 들고 다니며 담배를 즐겨 피우던 동네 할머니도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후 담뱃대를 부러뜨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교인 수가 늘어나 사랑방이 꽉 찼다. 어떻게 하면 예배당을 넓힐 수 있을까 연일 고민했다. 그 즈음 송아지 한 마리를 사서 키우고 있었는데, 그 송아지는 영문도 모르게 비실비실했다. 여물도 시원찮게 먹었고 잘 자라지도 않아 바싹 말라 피골이 상접했다. 동네 사람들이 얼마 못 가 죽을 거라며 포기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 소가 잘 자라서 큰 소가 되면, 팔아서 교회를 짓는 데 사용하겠습니다’라는 기도 이후 신기하게도 송아지는 건강하게 잘 자랐다. 1946년 소를 판 돈으로 집 앞에 초가 4칸의 예배당을 건립했다.

◆ "한국전쟁 당시 죽을 고비 여러 번 넘겨"

한국전쟁이 터지자 큰 형님댁과 작은 형님댁과 같이 피란길에 올랐다. 무너진 집이며 큰 포탄으로 움푹 패인 땅이 보였다. 사방에는 폭탄에 희생된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파주 고향 마을에서 20리 떨어진 천현면(현 법원읍) 동문리로 향했다.

식구 수가 많아 피난을 가기도 힘들었지만 전쟁으로 더 멀리 갈 수도 없었다. 그 많은 식구를 거느리고도 굶주리거나 어려운 일을 겪지 않았다. 고향과도 가까웠기에 피난지에서 고향 농토를 오가며 농사를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파평면사무소에서 면서기로 근무했다. 그리고 피난지에 가서도 두 번째 교회를 세웠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신분을 알 만한 것은 다 없앴는데도 북한군이 어떻게 알고는 집까지 찾아왔다. 어떤 저항도 못한 채 끌려갔다. 나는 무서움보다 가족들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나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 좋게 말해줘서 위기를 모면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나는 북한군의 길잡이로 뽑혀갔다. 이 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극적으로 도망쳐 나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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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성의영씨 생일을 맞아 경기도 용인시의 자택에서 촬영한 가족사진.



◆ 아이들 교육에 힘써…"하지만 공부로 성공하기를 바란 적 없어"

전쟁이 끝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세번째 교회인 파평교회를 세웠다. 나는 1958년까지 파평면사무소에서 면서기로 일하다 퇴직했다. 1959년 11월30일에 장로 임직을 받았다. 그리고 1966년 기존의 교회를 확장해 네번째 교회를 세웠다. 1970년까지 소규모로 농사를 지었다. 나는 농사에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발동기나 탈곡기를 임대해 작은 돈을 벌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4남4녀의 자식을 주셨다. 자식들은 하나같이 온전하게 성장했다. 집안에서 큰소리를 낼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다소 엄하게 키운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녀들에게는 항상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거나 나쁜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공부보다 도덕적 정결성을 강조했다.

되도록이면 절제하고 절약했지만, 자녀들 공부시키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시키려고 자녀들이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면 서울로 보냈다. 교육은 자녀들이 각자의 소질을 발견하게 하고, 좋은 재목으로 자라게 하는 최소한의 투자라고 생각했다.

공부를 중시했지만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훈계를 하거나 강요하지는 않았다. 자녀들이 공부를 잘해 성공하기를 바란 적도 없다. 나는 다만 각자가 맡은 직분을 잘 수행하길 바랐다.

나는 특히 자녀들이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길 바랬다. 젊은 시절 고향 두포리를 떠나 서울을 구경했을 때 느꼈던 그 희열감과 경이로움을 자식들도 경험하기를 기대했다.

서울 해방촌에 기와집 한 채를 사서 자녀들이 거기서 중고등학교를 다니게 했다. 그 집에서 방 2칸을 월세로 내 놓아 그 월세로 생활비를 충당하게 했다. 쌀과 부식 등은 집에서 갖다 먹게 했다. 큰 형님댁 조카도 자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학교를 다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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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어머니 산소를 방문했을 때 촬영한 가족사진. /사진=성낙도



◆ 아이들의 결혼과 서울로 이사
1971년 봄, 내 나이 53살 때 두포리 생활을 접고 서울 구로동으로 이사했다. 큰 아들과 둘째 딸은 결혼해 문산에 살고 있었고, 둘째 아들은 군대에 가 있었다. 시골전답을 다 팔았지만 서울 변두리 허름한 집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다. 구멍가게를 시작했다.

이듬해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을 위해 구멍가게를 하나씩 내 주었다. 그런데 1972년 여름 큰 폭우로 가게 세곳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이때 가족 자료 모두가 떠내려갔다. 다시 가게를 세웠지만 이듬해 큰 아들은 내 가게와 합쳐 하나로 운영했다. 아들도 며느리도 다 부지런하고 착해 돈을 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래 두 아들이 결혼할 때 집을 하나씩 장만해 줄 수 있었다.

둘째 아들은 목사 안수를 받고 성남에 있는 태평제일교회에서 목회일을 하게 되었다. 나는 매사에 아꼈으나 꼭 필요한 일에는 큰 돈이라도 썼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자기 분수에 맞게 근검하게 살고 있다.

◆ 내 갈비뼈, 아내를 떠나보내다

주변에서 우리 부부는 화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큰 소리 한번 내는 적이 없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다 아내의 이해심과 관용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인데 아내와 크게 부딪힌 적이 없었다. 아내가 그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고 내말에 전적으로 따라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70여년을 나와 동고동락한 아내는 2008년 1월 7일 87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늘 주위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던 아내였다. 아내는 보름 정도 앓다가 편안하게 잠자듯 세상을 떠났다. 아내의 장례식 날에는 1000여 명의 문상객들이 안타까워하며 빈소를 방문해 애도했다.

2018년 1월 7일, 아이들이 나를 위해 백수연을 베풀어 주었다. 나는 자식 손주들과 함께 감사의 예배를 드렸다. 나의 삶의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이끌어준 은혜라 생각한다.

다음은 막내아들 성낙도씨에게 아버님 성의영씨 자서전을 만드는 과정과 의미에 대해 물어봤다.

- 자서전 준비과정은 어땠나.
"조카가 할아버지 100세를 기념해 책을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으로 시작됐어요. 4남4녀 자식들이 모여 의논을 했죠. 솔직히 ‘뭐 그런 것까지 필요해’라는 의견도 있었어요. 일반적으로 자서전이라하면 성공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있잖아요. 하지만 대부분 자신의 부모님을 존경하겠지만,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는 자랑거리가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가족 모두가 참여해 아버지의 100세 기념문집을 만들기로 했죠.

처음에는 500권 준비해 가족들과 지인들한테 나눠 드릴려고 했어요. 근데 우리들한테는 귀하지만, 남들한테도 그럴까하는 생각이 들어 100권만 만들었어요. 필요하면 나중에 추가로 인쇄하기로 한거죠. 나중에 장례식장에서 책을 찾는 분들이 많아 턱없이 부족했어요."

- 자서전은 가족들에게 어떤 의미인가.
"자식으로서 부모님 책을 낸 것에 보람을 느꼈어요. 자식들 모두 각자 가지는 부모님과의 기억들을 공유하면서 부모님에 대해 더 잘 알게 됐어요. 감사하게도 주변 분들도 좋게 봐 주셨어요. 할아버지와 자식들의 이야기를 손주들이 알게 돼 좋은 것 같아요."

-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겠다.
"난 참 눈물이 많아서요. 5월 가정의 달에는 교회가는 게 싫어요. 부모님 좋아하셨던 찬양가 나오고 하면 어깨를 들썩이며 그냥 울어요.

특히 어머니와의 이야기가 있는데요. 1983년 제가 대학 3학년때 장학금 받은 돈으로 오토바이를 한 대 샀어요. 토요일날 오토바이를 끌고 나가는 순간에 어머니는 대문에 앉아 계셨어요. 타지 말아라. 내다 팔아라가 아니라, 식사도 안하시고 아들을 기다리시는 거에요. 걱정하시면서요. 그걸 제가 어떻게 타요. 저도 진짜 타고 싶어서 장학금으로 샀지만, 한 달 만에 팔았어요. 금전적으로 손해도 봤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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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폐렴과 장염 증세로 3주간 입원했을 때 셋째 딸과 막내아들 성낙도씨와 함께 한 모습. /사진=성낙도



- 아버지를 위한 고민거리를 드렸다는데.
"80세에 들어서면서 자식들에게 도움이 전혀 안되며 너무 오래 산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고민거리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미션을 드렸죠. 저녁 때 전화해서 ‘아버지,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하고 의논을 드리는 거죠.

그럼 여지없이 다음 날 아침 6~7시 사이에 전화가 와요. 아내에게 ‘이거 아버지 전화다’라며 웃으면서 받아요. 분명 아버지죠. 전화를 받으면 ‘잘 잤나? 내가 생각해보니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며 해법을 내놓으세요. 아마도 아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밤새 생각과 고민을 해서 전화하셨을 거에요. 그러면 저는 말씀드리죠. ‘아버지 덕분에 고민이 해결됐어요. 감사해요’라고."

- ‘형만한 아우 없다’는 일화는 뭔가.
"언젠가 집 옆에 길이 나면서 담을 허물어야 했어요. 보상을 받고 나서 새로 정화조 공사를 해야 했는데, 아버지께서 새 정화조를 사지 말고 예전 것을 옮겨 쓰라고 했어요. 아들 셋이서 투덜거리면서 작업을 했죠. 근데 결국 마지막에 정화조를 들어올리는 순간에 우지직하면서 깨졌어요. 그 순간 저의 첫마디가 ‘거 봐요’했는데, 옆에 있던 형이 저를 툭 쳤어요. 그 때 느꼈죠. 형만한 아우 없다. 형님들이 동생이 그렇게 버릇없이 굴어도 이해해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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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고 성의영 옹이 파평교회에서 장로 장립할 때 찍은 기념사진. /사진=성낙도



- 아버지에게 못해 드린 아쉬운 점이 있다면.
"후회하는 것이 하나 있어요. 몇 년 전에 아버지께서 치아가 거의 다 빠져서 틀니를 해드리려고 치과에 갔더니 어렵다고해서 포기한 적이 있어요. 좀더 일찍 할 수 있을 때 강권해서 틀니를 해드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아요. 아버지 생신이나 집안 행사 때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젊은 우리들만 먹고 즐기니 마음껏 드시지 못하는 아버지께 죄송스럽기만 했어요."

- 아들이 자서전을 제안한다면.
"우리 아들이 어려서부터 지켜봤나봐요. 아들이 지난해 연말 한의원 개원 준비하느라 같이 많이 다녔는데, 이놈이 툭툭 던지는 말이 할아버지, 큰아버지와의 대화, 일들을 다 기억하더라구요. 저는 태어나게 해 준 것 만으로도 부모님께 감사하게 생각하거든요.

근데 아들은 제안하지 않을 것 같아요.(큰웃음 하하하) 자식이 철들기 전에는 부모가 자식을 이해해야 하고, 자식이 철든 다음에는 자식이 부모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마 우리 애는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을 거에요."

- 마지막으로 소회를 밝힌다면.
"우리는 평범한 가정이에요. 형제들 모두 내가 손해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형이 동생들을 위하고, 동생은 형님을 먼저 챙기고. 그래서 화목한 것 같아요. 평범한 이야기가 재미없을 수도 있죠. 위대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의 자서전과 비교하면 초라해 보일 수도 있죠. 하지만 가족들끼리는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나도 매순간 더 열심히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고(故) 성의영 옹(翁) 연표 >
1918년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두포리 출생
1939년 남상순과 결혼
1945년 일본 나가사키현 강제징용
1945년 10월 귀국/파평교회 창립
1946년 파평면사무소 근무/초가 4칸의 예배당 건립
1950년 한국전쟁/경기도 파주군 천현면 동문리로 피란
1958년 파평면사무소 퇴직
1959년 파평교회 장로에 장립
1971년 서울로 이사
2008년 아내 소천(召天)
2018년 백수연/자서전 출간
2019년 2월 사망

*조선비즈는 자서전을 제작하고 싶은 분들을 돕고 있습니다. 원고작성부터 책인쇄 제본까지 모두 대행해 드리는 ‘조선비즈 기억의책’에 관심있는 독자께서는 ‘조선비즈 기억의책' 홈페이지(memory.chosunbiz.com)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유신 기자(run2u@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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