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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월)

"의도치 않게 가해자 되는 불상사" 문구에 불 붙은 캠퍼스 '미투論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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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치 않게 성폭력·성희롱의 가해자가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부적절한 언행으로 인해 돌이키기 어려운 곤란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 주시길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

지난 8일 한양대학교 학생처장이 최근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과 관련, 전교생에게 보낸 ‘당부 메시지’가 학내에서 논쟁(論爭)을 일으키고 있다.

메시지를 받은 학생 일부가 “성폭력 가해를 불상사(不祥事)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냐” “ 피해자를 ‘꽃뱀’으로 보는 관점이 읽힌다”고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반대로 “단순히 조심하자는 얘긴데 과민(過敏)한 것 아니냐”는 반론도 있다.

미투운동이 ‘피해자 폭로→가해자 대응’ 도식에서 벗어나 성의식 담론(談論)으로 확장하는 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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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한양대학교 학생이 12일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 출구에 붙은 대자보를 바라보고 있다. /고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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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곳곳에 비판 대자보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미투운동의 이름으로 발송했다”

“성폭력 가해자가 되지 않게 주의하라”는 학생처장이 이메일이 발송된 지 하루 만인 9일 지하철 2호선 한양대역 출구와 사회과학대학 1층, 한양대학교 학생처 앞 등 곳곳에 학생처장의 이메일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한양대 인문대 학생’이라고 밝힌 글쓴이는 대자보를 통해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미투 운동의 이름으로 발송하는 학생처에 분노했다”고 밝혔다. 그는 학생처장의 이메일 가운데 ‘돌이키기 어렵고 곤란한 상황’이라는 대목을 특히 문제 삼았다. 그는 “그것은 성폭력 가해자가 받아야 할 합당한 처벌”이라면서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가해자를 옹호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 지역 대학연합 페미니즘 소모임 한양대지부도 대자보를 통해 학생처를 비판했다. ‘의도치 않게 성폭력·성희롱의 가해자’라는 대목에 대해 대자보는 “의도치 않게 일어나는 성폭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을 성적 대상화해 희롱하고 추행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순한 의도가 가득한 범죄 행위”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는)“미투 운동을 그저 가해자를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하는 ‘SNS(소셜미디어)활동’ 정도로 치부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양대 반(反)성폭력·성차별모임 '월담'도 “잠재적 가해자들에게 (학생처장이) 심심한 위로를 일찍이 보낸 것”이라며 “가해자의 입장에 서서 (성)범죄 행위를 ‘곤란한 상황’으로 일축했다”고 했다.

◇“過敏한 반응… 의미를 왜곡한 것”

이로부터 다시 하루가 지난 10일. 이번에는 한양대 학생 커뮤니티에 재(再)반박 글이 올라왔다. 비판론자들이 학생처장의 글을 전혀 다른 의미로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는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되는 불상사를 피하라’는 대목은 말 그대로 ‘여러분의 어떤 행동이 의도치 않게 남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으니 앞으로 다들 조심하라’는 것 아니겠느냐”면서 “(일부가) 이 말을 왜곡해서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글에는 30여 개의 댓글이 달리며 논쟁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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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되는 불상사를 피하라”는 학생처장의 ‘전체 이메일’로 한양대에서 성의식 논쟁이 일었다. /그래픽=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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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에서 만난 학생들의 견해도 분분했다. 남학생들은 주로 “(대자보 주장은) 지나치게 과민한 해석”이라고 봤다.

대자보를 읽던 재학생 김모(23)씨는 “내가 보기엔 ‘상대방 눈에는 성폭력으로 비춰질 수도 있으니, 그런 의도치 않은 불상사를 조심하라’는 의미 같다”고 했고, 재학생 이기준(19)씨도 “그럼 학생처장이 가해자를 옹호하려는 의도로 이런 메시지를 전교생에 뿌렸다는 말이냐”고 말했다.

재학생 최모(24)씨는 “학생처장이야말로 (이 이메일로)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된 셈”이라면서 “이런 오해를 막기 위해서 말이나 행동을 사전에 조심하자는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내놨다. 반면 이모(23)씨는 “학생처장의 글을 보면 피해자 중심으로 사고를 못 하는 것 같다”며 “오히려 교내에서 성폭행·성희롱 폭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학생들을 입막음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논란이 커지자 학생처장은 “피해자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가해자의 곤란함을 먼저 생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등 적절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며 “이로 인해 상처받았을 학생 여러분들께 사과드린다”는 전체 메일을 다시 보냈다. 한양대 측은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과의 통화에서 “캠퍼스에서 벌어지는 ‘올바른 성의식’에 대한 담론으로 이해해달라”고 밝혔다.

이메일을 처음 발송한 학생처장 서원남 한양대 중문학과 교수는 “문제제기 한 학생의 말을 십분 이해한다”면서도 “(가해자를 옹호하는) 그럴 의도는 전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고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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