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APEC 개최지 경주로
국태민안 기원 여행
APEC 정상회의 개최 예정지인 천년 고도 경주에서 천·지·인을 만난다. 별을 보며 하늘의 뜻을 헤아렸을 천문대, 땅의 이치를 담아낸 왕릉 그리고 '국태민안'의 소망을 담아 조각했을 불상까지. 사진은 석굴암 입구의 '통일대종'. 일반 탐방객도 새해 소망을 기원하며 타종 체험을 해 볼 수 있다. /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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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한쪽으로 밀려나 있던 도시에 눈길이 갔다. 경북 경주다. 청사(靑蛇)의 해인 올해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경주 최대 이벤트”라는 ‘2025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의’(이하 APEC 정상회의)가 열린다. 유난히 다사다난한 묵은해를 보냈기에 ‘안녕’이라는 말이 반갑고, 희소식이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신년. 하반기 APEC 정상회의 개최 예정지인 경주로 떠났다. 천년 고도의 ‘보물’들은 안녕하실까.
◇개통한 열차, 황금 노선 버스 타고
중년에 홀로 수학여행 아니 ‘수행 여행’에 올랐다. 의미를 붙이자면 국난 극복을 기도하고, 새해 각오도 다질 겸. 때마침 부전(부산)~강릉을 잇는 동해선(ITX-마음)과 청량리~부전을 잇는 중앙선(KTX-이음)이 개통했다는 소식에, 봄도 아닌 이 겨울에 서둘러 경주행 표를 끊었다. 경주는 두 열차 개통으로 가까워진 여행지 중 하나. 서울 청량리에서 KTX-이음을 이용할 경우 빠르면 2시간 50분 만에 경주역에 도착한다.
경주역사에 들어서면 ‘2025 APEC 성공 개최 기원’이라고 적힌 현수막부터 눈에 들어온다. 본 행사는 하반기지만, 경주시에 따르면 내달부터 이 도시에선 크고 작은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다. APEC 정상회의 관련 현수막은 경주 시내에 가까워질수록 더 자주 보인다. 며칠 새 ‘참사 추모’ 관련 현수막도 더해졌다.
시간대가 잘 맞아떨어져 경주역 앞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710번’ 버스를 목격한다면 전력질주를 해서라도 올라탈 일이다. 2023년부터 운행을 시작한 710번 버스는 경주 여행의 ‘황금 노선’이라고 불리는 ‘10번’ 버스 다음으로 경주 도심 여행을 알차게 즐길 수 있는 노선으로 통한다. 경주역을 출발해 ‘황리단길’ ‘천마총 후문’ ‘동궁과 월지’ ‘분황사’ 등 주요 유적과 명소, APEC 정상회의 개최지가 될 보문관광단지 등을 지난다. 다만 배차 간격이 50분 이상이다. 10번 버스는 고속버스나 시외버스 터미널을 이용할 경우 도전해볼 만하다.
◇대릉원에 목련이 피기를 기다리며
방학을 맞아 역사·문화 탐방에 나선 아이들이 신라 전통 의상을 곱게 차려 입고 대릉원 소나무숲 탐방로를 거닐고 있다. /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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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군 중 경주 도심에 있는 대릉원은 노동동과 황남동 사이의 신라 시대 고분군을 통칭한다. 장년 이상에겐 ‘황남동 고분군’으로 익숙하다. 미추왕릉, 황남대총, 천마총(유료 관람) 등 23기의 능이 한데 모여 있다. 대릉원에 들어서면 예로부터 죽은 자의 벗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무덤가에 심었다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먼저 반긴다. 이어 모나고 뾰족한 건물 대신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의 능들이 겹겹이 이어진다. 추운 계절을 견디며 초록빛을 잃어버린 능 위로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펼쳐진다.
대릉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능은 미추왕릉이다. 대릉원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 ‘재위 23년에 돌아가니 대릉에 장사 지냈다’는 미추왕에 대한 기록에서 유래했다.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곳 미추왕릉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미추왕릉 주변엔 벚나무가 두르고 있다. 그러기에 겨울보다는 꽃 피고 단풍 드는 봄가을에 더 볼거리가 많은 능이다.
대릉원 내 연못과 가까이 있는 황남대총. 황남동 고분군에서도 가장 큰 능이어서 '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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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목련 포토존'은 겨울에도 기념 촬영을 위한 발걸음이 이어진다. 목련 포토존은 황남대총 뒤편에 있다. /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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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릉을 크게 돌면 연못 부근에 황남대총이 이어진다. ‘대총’이란 이름처럼 대릉원이 있는 황남동에서 가장 큰 고분이다. 얼핏 색깔도, 모양도 표주박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능은 출토 유물로 보아 부부, 왕과 왕비의 능으로 추정하나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산책로를 따라 뒤편으로 이어지는 능은 젊은 층에겐 ‘목련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한겨울에도 아랑곳없이 기념 촬영을 위한 줄이 이어진다. 1000년 전 누군가의 무덤이 후대에 힐링 명소, 안식처가 될 줄 알았을까. 지금은 목련 나무가 앙상한 모습일지라도 곧 봄이 오면 다시 새순이 돋고 하얗고 해사한 얼굴로 꽃을 활짝 피우리라. 굳게 믿으며 발걸음을 돌려본다.
젊은 층에서 경주의 '고분 뷰' '무덤 뷰' 카페로 유명한 '두닷디스터브 경주본점'. 창밖으로 황남동 고분과 눈을 맞춘다. /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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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햇살이 스며드는 카페 창가에 앉아 소금빵아이스크림을 맛보며 고분을 감상하는 시간도 색다르다. 단순한 모양의 고분과 높은 건물 하나 없는 여백의 도시가 숨 쉴 틈을 내어준다. 이 도시에 자리한 모든 것의 물리를 통찰할 순 없지만, ‘고분 멍’을 하고 있노라면 무덤들이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역사는 그저 무수히 반복되며 이어지기에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느냐”고, “이렇게 견뎌낸 오늘 하루도 역사의 한 조각이 되지 않겠느냐”고.
◇첨성대 지나 보문단지까지
대릉원을 나와 황리단길의 왕복 2차로 하나만 건너면 첨성대 가는 길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는 ‘동양 최고(最古) 천문대’ 첨성대는 볼 때마다 다르게 읽힌다. 너른 벌판에서 9m의 몸으로 1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국난과 천재지변을 이겨냈을 첨성대와 다시 마주하니 불멸의 유산처럼 느껴진다.
천년이 넘는 시간을 견뎌온 첨성대의 시간을 감히 짐작해 볼 수 없지만, 한 겨울 너른 벌판을 지키고있는 첨성대는 기개가 느껴진다. 첨성대와 가까이 있는 핑크뮬리가 다시 핑크 빛 물결을 이룰 때쯤 이 도시에선 APEC 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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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관광단지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APEC 정상회의 성공 개최 기원 조형물. 경주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APEC 정상회의를 차분히 준비하고 있다. /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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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코스는 APEC 정상회의 주요 무대가 될 보문관광단지다. 첨성대에서 차로는 15분 남짓, 버스(10번, 100-1번 버스 등)를 타면 정류장을 거치기에 30여 분 걸린다. 보문관광단지는 1970년대 관광 개발의 시작을 알린 국내 최초 관광단지다. 올해는 관광단지로 지정된 지 50주년. 보문단지 중심엔 APEC 정상회의 핵심 회의장으로 활용될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도 눈에 들어온다.
겨울 비수기에 접어든 관광단지는 차분한 분위기다. 1년 중 보문관광단지의 극성수기는 보문호를 두른 벚꽃이 피어나는 시기다. 미국 CNN 방송에 ‘한국의 비경’ 중 하나로 소개된 ‘보문정’도, ‘경주월드’ 등 주요 시설들도 겨울나기 중이어서 요즘 풍경은 기대에 못 미친다.
아쉬운 대로 보문 호반길을 걸어볼 일이다. 전체 6.5㎞로 완주(약 2시간 소요)하면 만보 걷기를 달성할 수 있다. 물너울교, 징검다리, 경주 관광역사공원 등이 있어 지루하지 않다. 잔잔한 호수를 곁에 두고 걸어 마음이 고요해지는 건 덤이다. 보문관광단지를 오가는 길에 있는 헌덕왕릉도 들러볼 만하다. 전형적인 신라 시대의 왕릉 양식을 살펴볼 수 있을뿐더러 능 주변으로는 도래솔이 두르고 있어 고즈넉한 운치를 만끽하게 된다.
APEC 실무를 담당하는 경주시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경주에 방문한 APEC 정상회의 현장 실사단은 대릉원을 비롯해 불국사, 동궁과 월지, 월정교, 국립경주박물관 등을 둘러봤다. 불국사로 향하는 길, 경주 토함산 중턱에 자리한 석굴암도 지나칠 수 없다. 신라 경덕왕 시기 시중이었던 김대성과 이성룡에 의해 창건돼 혜공왕 10년인 774년에 완공한 통일신라의 대표 건축물이다.
신라 멸망 후 존재감이 약해졌다가 조선 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방치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때 우연히 발견돼 일제에 의해 엉터리 복원이 진행되면서 오히려 훼손되는 비운을 겪었다. 원숙한 조각 기법이 드러나는 본존불을 비롯해 저마다 개성이 뚜렷한 조각상 등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평정심이 찾아온다. 하지만 불자와 탐방객들이 끊이질 않아 오롯이 감상하기는 쉽지 않다.
통일신라 불교 건축과 불교 미술의 극치를 엿볼 수 있는 석굴암의 본존불. / 경주시 관광자원 영상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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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소원성취등으로 가득한 석굴암 앞마당. /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새해맞이 소원 등이 가득한 경내를 걸어나와 다시 석굴암을 나서는 길, 종소리가 토함산에 울려 퍼진다. 석굴암 초입에 있는 ‘통일대종’이다. 지름 2.37m의 이 거대한 종은 민족 통일의 염원을 담아 1989년에 설치됐다. ‘이 종을 울리는 사람은 번뇌가 사라지며 지혜가 생겨나고 고통을 여의며 정신통일이 쉽게 이루어진다’고 하니 안 쳐볼 수 없겠다. 낮 시간에 한해 1인 1타 1000원 이상 체험료를 기부한 후 체험 가능하다. 체험료는 이웃돕기 성금으로 쓰인다.
석굴암 관계자는 “연말연시에는 종을 치는 사람들이 부쩍 많다. 날씨 좋은 계절에는 줄 서서 치기도 한다”고 했다. 커다란 종 앞에 서서 마음속으로 ‘하나, 둘’을 외치고 ‘셋’에 힘껏 종을 쳤다. 웅장했다가 점점 맑아지는 종소리가 물결의 파장처럼 퍼져 나가 토함산 자락에 차츰 조용히 잦아들었다. 마치 세속의 소음은 모두 덮어두라는 듯 토닥토닥.
다시 상경길에 오르는 길에 만난 국립경주박물관 영남권수장고. 떠나는 이를 배웅하듯 어두운 밤을 따스하고 은은한 불빛으로 밝혀주고 있다. 마치 청사초롱처럼. /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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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옥 뷰 식당에서 도가니탕 먹을까? 석갈비 맛볼까? ]
고즈넉한 한옥에서 경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최부잣집'의 내림 음식을 선보이는 '요석궁1779'. /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문화체육관광부 '2024 우수 문화 상품'에 선정된 '요석궁1779'의 단품 메뉴 도가니탕. 반찬으로 나오는 낙지젓을 곁들여먹으면 더욱 맛있다. /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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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EC 현장 실사단이 다녀간 맛집
경주는 미식 여행을 해도 좋을 만큼 맛집들이 산재해 있다. 이왕이면 모험보다는 검증된 맛집을 꿰는 것도 방법. 지난해 경주 APEC 현장 실사단이 다녀간 맛집이라면 믿을 만하겠다.
‘요석궁1779’는 270년 전통의 경주 교촌마을 최부잣집 내림 음식으로 구성된 가정식과 시절식을 맛볼 수 있는 한식당이다. 1인 6만9000원부터 시작하는 한정식 코스 요리가 유명하지만, 겨울엔 단품 메뉴인 도가니탕(1만8000원)을 찾는 손님도 많다. 문화체육관광부 ‘2024 우수 문화 상품’에 선정된 메뉴이기도 하다. 깍두기, 낙지젓, 장아찌 등과 함께 한 상 차림으로 깔끔하게 나온다. 진한 국물에 건더기도 푸짐해 먹다 보면 어느새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다. 창 너머 장독대가 놓인 소담스러운 한옥 마당 풍경이 맛을 더한다.
보문관광단지에 있는 ‘소솜당’은 아담한 한옥 사랑채에서 식사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석갈비, 김치찜, 불제육이 대표 메뉴. 1인 1만6000~1만9000원(2인 이상 주문 가능)이어서 부담 없는 편이다. ‘투 톱’은 김치찜과 석갈비다. 취향에 따라 ‘뚝배기 함박’ ‘오징어땡전’ 등을 곁들이기도 한다. 또 다른 맛집인 북군동 신라정은 육향(肉香)을 즐기는 이들이 찾는 식당이다. 한우육개장(1만2000원), 한우순두부찌개(1만2000원) 외에 한우불고기전골(2인분 3만5000원)과 한우철판불고기(2인분 3만원)가 인기다. 여기에 한우떡갈비(1만5000원)를 추가하는 식. 파채 위에 얹어내는 떡갈비는 양이 살짝 아쉬우나 달곰하고 고기의 풍미가 은은해 어린이들도 잘 먹는다.
보문관광단지 내 힐튼호텔 중식당 ‘실크로드’와 용강동의 매운소갈비찜 맛집 ‘읏듬동인동찜갈비’도 현장 실사단이 방문한 경주의 맛집들이니 여행 수첩에 기록해 두자.
[경주=박근희 여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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