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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 (목)

[특파원 리포트] 새해 다짐은 ‘썩지 않은 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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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소셜미디어에 범람하는 '대화하는 고양이' 밈(meme)./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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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양이가 ‘음냐냐냐’라며 잔소리를 하자, 나머지 고양이는 억울하다는 듯 ‘먀’라고 응수한다. 몇 차례 언쟁이 오가더니 고양이 한 마리가 다른 고양이의 머리를 ‘퍽퍽’ 내리친다. 이 정해진 각본에 덧쓰인 대사는 흔한 부부 싸움일 수도, 애인 간의 실랑이 일 수도 있다. 웃기긴 한데 별 영양가는 없는 이런 밈(meme)을 하루에도 수차례 소비하며 실소(失笑)하고 있다면, 불행히도 당신은 이미 ‘브레인 롯(brain rot·뇌 썩음)’ 상태에 빠졌을 확률이 높다.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최근 ‘브레인 롯’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이는 원래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저서 ‘월든’에서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사회에 만연한 물질주의를 지적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였지만, 유튜브·인스타그램 등의 저품질 짧은 영상을 무한 시청하며 사고가 정체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재해석되며 급부상했다. 옥스퍼드 사전은 “이 단어는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됐고, 올 들어 사용 빈도가 전년 대비 230% 급증했다”고 했다.

뇌가 썩어버린 우리가 진짜와 가짜가 모호한 인공지능(AI) 시대를 당해낼 수 있을까. 올해의 단어 선정 소식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엄습한 것은 공포감이었다. 우리는 이미 엄청난 기술이 없어도 AI로 손쉽게 이미지나 영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내년부턴 보고서 요약부터 고객 대응까지 대신해주는 ‘AI에이전트(비서)’들이 생활 속 곳곳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각종 빅테크 기업들의 투자 내역과 기술 발전 속도를 보면 AI가 사람 곁에서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함께 살아갈 날도 그리 멀진 않아 보인다. 우리는 선택의 여지 없이 사람보다 똑똑하고, 진짜보다 진짜 같은 정보를 몇 초 만에 만들어내는 AI와 공존해야 할 운명이다.

AI 전문가들은 AI의 발전을 막기는 어려우며, 이를 대비해 사람들이 무엇보다 독립적인 시비(是非) 분간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지적한다. 기술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마련하는 안전 대책을 믿지 말고, 주도적으로 AI의 거짓을 파악하고 검증하는 사고력을 갖추라는 뜻이다. 문제는 손가락질 몇 번으로 뇌가 도파민에 절어지는 ‘뇌썩음’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신경을 날카롭게 유지해야 하는 비판적 사고 같은 게 귀찮아진다. 태어나면서부터 소셜미디어에 노출된 ‘알파세대(2010~2024년 출생)’가 특히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당장 나도 매일 저녁 30분은 짧은 영상을 봐야만 잠에 든다. 국내외로 사상 초유의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는 와중에 밤마다 뇌썩음 상태가 되어 있는 사실에 종종 부끄러워지곤 한다. 곧 다가올 2025년엔 매해 반복하는 ‘10kg 다이어트’ 같은 뻔한 다짐은 안 하기로 했다. 대신 내 뇌가 썩지 않고 기능하길. 진실을 추구함에 있어 게으름이 없길. 빅테크의 기술 횡포에 정신이 함몰되지 않기만을 바랄 것이다.

[실리콘밸리=오로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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