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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6.25가 세계사에 끼친 일곱 가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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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한반도 게임: 미중 전쟁과 코리안 딜레마 (2)

조선일보

한국전쟁 당시 1951년 충주 부근에서 미 공군 대형 수송기 페어차일드(Fair Child) C-119가 보급품을 낙하하고 있다./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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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후 마오쩌둥이 참전을 결정한 여러 이유 중엔 흔히 간과되는 중대한 계략이 숨어 있었다. 마오쩌둥은 대군을 급파해 38선 이북을 되찾고서 그 파죽지세를 몰아 이남 주요 지역을 점령할 수 있다면 미국과 협상하여 그 지역을 대만과 맞바꿀 수도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마오쩌둥 입장에서 미국은 본래대로 남한을 되찾고 중국은 피 흘린 대가로 대만을 먹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전리품은 없을 듯했다.

6.25와 “대만 해방”의 꿈

마오쩌둥 자신도 그러한 계략의 실현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진 않았다. 중공군의 개입 이후 한국전쟁은 어차피 한반도의 상황을 6·25전쟁 발발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싸움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군사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할 때 중공군이 이미 한반도에 진주해 있는 대규모 유엔 병력을 물리치고 38선 이남 주요 지역을 점령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전쟁 발발 이틀 만에 파병한 결정한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동시에 제7함대를 보내 대만 해역을 엄호했다. 트루먼은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내세운 스탈린의 전쟁이 곧 마오쩌둥의 전쟁으로 비화할 수 있음을 내다봤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미국이 쉽게 대만을 포기할 리도 만무했다. (송재윤,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 제9장 “마오의 도박, 미국과의 전쟁”)

산전수전의 게릴라 전사 마오쩌둥이 그 점을 모를 리 없었다. 참전 결정 때부터 마오쩌둥의 본래 목표는 북한 수복이었다. 중국 측 참전의 최대 명분은 “미제에 대항해 조선을 지원한다”는 항미원조(抗美援朝)였다. “항미”란 북한을 침략한 “야심랑(野心狼) 미제(美帝)”를 38선 이남으로 물리친다는 구호였고, “원조”란 만주로 쫓겨온 어린 동생 같은 김일성 정권을 되살려준다는 표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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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19일경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참전하는 중공군./공공부문, 윌슨센터 홈페이지


냉혹한 국제정세의 역관계를 모르지 않았음에도 마오쩌둥에겐 현실적 목표만큼이나 당원들과 인민을 설득할 원대한 이상이 필요했다. 국민당군을 물리치고 대륙을 통일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한 지 고작 1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미국과의 전쟁에 나선 마오쩌둥은 실리 못지않게 여러 전쟁의 명분이 필요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대만 해방”이라는 큰 꿈이었다. 마오쩌둥으로선 만약 한반도에서 피 흘린 대가로 미국과 협상하여 꿈에라도 대만을 차지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통일 대업을 완성하는 최대 과업이 아닐 수 없었다. 마오쩌둥이 오매불망 염원했던 “대만 해방”은 1970년대 후반까지도 중국공산당의 일관된 양안(兩岸)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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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중국에서 제작된 “대만 해방” 포스터. “견결히 대만을 해방하여 고난 중인 대만 인민을 구하자!”는 구호가 적혀 있다./chineseposter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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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미·중 전쟁의 결과

한국전쟁의 세계사적 의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국전쟁은 이후 국제적 세력 관계를 어떻게 뒤바꿨을까? 어떤 이는 대중 강연에서 한국전쟁의 의미를 애써 폄훼하면서 남·북한의 독재정권만 강화했다는 1차원적 주장을 늘어놓지만, 국제정세의 큰 흐름을 전혀 모르는 백면서생의 궤변일 뿐이다. 한국전쟁은 최소 일곱 가지 점에서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첫째, 한국전쟁은 2차대전 이후 ‘미국 주도의 규칙 기반 자유주의 국제질서(U.S. led rules-based liberal international order)’를 확립하는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다. 냉전 시대 공산 세력의 팽창주의 의도를 간파한 미국은 전 세계 전역에 적극적인 방어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미국은 조지 케넌(George Kennan, 1904-2005)의 ‘봉쇄 전략(containment policy)’에 따라 일본, 독일 등 전략적 핵심 요충지에만 주둔지를 남겨두고서 그 외 지역에선 병력을 철수하는 대규모 해외 병력 감축 정책을 진행하고 있었다.

지난 회 이미 살펴봤듯 한국전쟁 발발을 두 달 반 앞두고 미 국무부 정책 계획 감독 폴 니체(Paul H. Nitze, 1907-200)는 소련이 팽창주의적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 여러 지역에서 국지전을 벌일 수 있음을 내다보고서 미국이 군비를 강화하여 전 세계에 거미줄처럼 촘촘한 반공(反共)의 주둔지를 구축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의 숨은 의도를 꿰뚫어 본 니체의 기밀문서에 따라 즉각적 유엔총회를 소집하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파병을 결정했다. 요컨대 한국전쟁은 미국의 세계 전략을 바꾸는 결정적 계기였고, 미국의 세계 전략이 바뀐 결과 냉전 이후 세계사가 바뀌었다.

둘째, 치열했던 한국전쟁의 결과로 대한민국과 대만은 동시에 냉전기 자유 진영의 최전선으로서 미국이 주도하는 규칙 기반(rules-based)의 국제질서에 편입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남로당 주도의 내란(內亂, insurgency)에 휘말려 베트남 모델의 공산화 과정을 갔을 개연성이 높다. 대만 역시 반공의 보루로서 존립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마오쩌둥이 한국전쟁에 투입한 그 대규모 병력을 오롯이 대만 침공에 투입해서 대규모 통일 전쟁을 감행했다면 대만의 중화민국이 존속하지 못했을 수 있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6·25남침을 저지른 결과 남한의 내란과 중국의 내전은 유엔군이 개입한 국제전으로 비화했고, 덕분에 대한민국과 중화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하는 반공의 전초기지로 연명할 수 있었다.

셋째, 한국전쟁 덕분에 공산화를 막은 대한민국과 대만은 급속한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루면서 건실한 중진국으로 발돋움했고, 1980년대 말 거의 동시에 민주화를 이루면서 선거를 통해서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명실공히 자유민주주의라는 헌정적 이상을 실현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대한민국과 대만은 현재 전 세계에 산업의 쌀이라는 반도체를 80% 이상 공급하는 세계 경제의 허브로 성장해 있다.

넷째, 한국전쟁 과정에서 미국과의 전쟁을 치른 중국은 전쟁 종결 후에도 무려 25년의 긴 세월을 세계 경제와 절연한 채 공산주의적 집산화(集産化, Communist collectivization)와 계급투쟁의 광열에 휩싸인 채 대기근과 문화혁명을 겪어야만 했다. 마오쩌둥은 미국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대내적으로 전체주의적 통제를 강화할 순 있었지만, 자유 진영을 통째로 적으로 돌린 결과 중국은 거대한 세계 시장을 잃고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궁핍을 벗어날 수 없었다. 흔히 마오쩌둥이 기근을 해결한 성군이라 미화하지만, 실상을 보면 그 시대 중국은 저성장과 저개발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렸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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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중국에서 제작된 포스터. 대만과 조선에 대한 미국의 침략에 반대한다는 구호가 담겨 있다./chineseposter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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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한국전쟁의 계기로 소련도 역시 미국과의 첨예한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군사적 대립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소련은 미국, 영국과 함께 연합군으로 나치 독일과 전쟁을 치렀던 2차 대전의 승전국이었다. 공산권의 대원수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 전쟁을 무산시키고 전향적 개혁·개방 노선을 추구했다면 30년 후 경제적으로 파산 상태에 이르러 뒤늦게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추진하는 사태를 피할 수도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로 팽창주의 마각을 들켜버린 스탈린은 연합국의 승전국으로서 누릴 수 있었던 특권과 기회를 모두 상실해 버렸다. 자유 진영 전체를 적으로 돌린 결과 2차대전의 패전국 일본과 독일이 세계 2, 3위의 경제 대국으로 급성장할 때 소련은 빈곤과 부패의 악순환에 빠져 있어야만 했다.

여섯째, 한국전쟁은 “북한 문제(The NK problem)”라는 세계사적 골칫거리를 남겼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절멸 직전까지 내몰렸던 북한 김일성 정권은 마오쩌둥의 참전 덕분에 휴전선 이북을 점령할 수 있었다. 중국은 북한을 완충지로 남겨둬야 하는 이유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로 설파하려 하지만, 현실을 보면 북한은 단순히 중국의 입술이 아니라 중국의 핵기지임을 알 수 있다. 북한의 핵무장은 정권 영속을 바라는 김씨 왕조의 의지와 김씨 왕조의 현상 유지를 원하는 중국의 의지가 공명한 결과물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중국의 묵인과 방조 아래서만 이뤄질 수 있었다. 북한이 핵무장에 성공함으로써 중국은 한국, 일본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미국에 대한 군사·전략적 레버리지를 극적으로 강화할 수 있었다. 아니라면, 북핵은 그대로 두고서 남한에 미군의 탄도탄 고고도 요격인 체계 사드(THADD)가 배치될 때 경기를 보이는 중국의 이율배반은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북한의 핵무기는 휴전 상태의 한반도에서 치밀하게 전개되는 제2차 미·중 전쟁에서 최전선에 배치된 중국의 전략 병기라 할 수 있다.

일곱째, 한국전쟁이 지금도 세계사에 드리운 가장 큰 그늘은 바로 오늘날 한국과 대만이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플래시포인트(flashpoint)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새삼 확인된다. 국제정치학에서 플래시포인트란 대규모 세계대전 발발 가능성이 매우 높은 일촉즉발의 화약고를 뜻한다. 세계 지도를 놓고 보면, 최소 다섯 지역의 플래시포인트를 꼽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국경, 아프리카 사헬(Sahel) 지역,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 외에 양안(兩岸, 대만 해협)과 남북한이 바로 그러한 위험지대이다. 그중에서도 양안과 남북한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력 덕분에 더더욱 위중한 지역으로 여겨진다.

한반도와 대만 해협: 미·중 전쟁의 플래시포인트

한국전쟁이 휴전에 돌입한 후 71년이 지났음에도 한반도와 대만 해협은 여전히 미·중 전쟁의 플래시포인트로 남아 있다. 한국전쟁 당시와는 달리 한국과 대만은 세계 경제에서 절대로 없어선 안 될 중대한 산업기지로 변모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한국과 대만을 끼고 도는 미·중 갈등의 전운은 음산하다.

대만 해협으로 해마다 세계 무역 총액의 20%(2조 4,500억 달러)의 물동량이오간다. 대만 해협에서 군사 충돌이 발생하여 전 세계 20%의 물동량이 막히면, 전 세계 경제는 일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특히나 대만은 전 세계 최첨단 반도체의 90%를 생산한다. 대만 해협의 비상 상황은 세계 모든 국가의 데이터 센터나 최첨단 군사 시설은 물론, 인류 개개인의 스마트폰 사용에도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Crossroads of Commerce: How the Taiwan Strait Propels the Global Economy”)

대만 해협에서 비상사태가 발생할 때 가장 큰 타격을 입을 나라는 다름 아닌 대한민국과 일본이다. 일본 무역의 25%, 한국 무역의 28% 이상이 그 비좁은 해협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석유, 가스, 석탄 등 필수 에너지 자원이 대만 해협을 거쳐서 한국과 일본에 운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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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20일 라이칭더 대만 총통의 취임 직후 분열주의 분쇄를 구호로 내걸고 대만 해협에서 중국이 군사작전을 펼치고 있다./bb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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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만성이 되어버려 증시조차 요동치지 않지만, 북한은 틈만 나면 대륙간 탄도탄 미사일을 발사하고, 중국은 대만을 향해 노골적인 군사 위협을 가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언제든 일본과 한국을 경제적 파탄으로 몰고 갈 수 있다. 군사 충돌 등으로 한국, 일본, 대만의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면, 밀접하게 연동되는 세계 경제도 공황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늘날 세계 경제가 한국과 대만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세계 체제의 현실은 위태롭고 부조리해 보인다. 대만 해협과 한반도는 자유 진영의 애로(隘路, choke point)이자 관문(關門)이다. 반자유와 반서방의 기치를 내걸고 이른바 “악의 공조”를 이룬 북·중·러·이란 등이 위기에 내몰리면 가장 먼저 노릴 자유 진영의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중국은 그 점을 모를 리 없다. 이미 2005년 후진타오 정권은 ‘반분열(反分裂) 국가법’을 제정하여 필요하면 언제든 대만을 향해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천명해 왔다. 시진핑 정권은 더욱 노골적으로 대만을 향한 군사 위협을 가해왔다. 특히 2022년 이후부턴 더욱 위협적인 군사 도발이 전개되고 있다. 군사적 위협 이외에도 베이징은 경제적 압박, 사이버 공격, 정치적 개입, 허위 정보 유포, 외교적 고립화 전략 등 무수한 비군사적 수단으로 대만을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만에 머물지 않고 중국은 대한민국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직·간접적 영향력도 증폭시키고 있다. 때론 북한을 앞세우고, 때론 북한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중국은 한국을 군사적으로 위협하고 경제적으로 압박하면서 어르고 길들이려 한다. 한국 정부나 민간기업은 중국의 사이버 공격에 노출돼 있다. 중국은 갈수록 대담하게 한국의 여론시장을 파고들어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고 있다. 대만과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중국의 비군사적 공격 앞에 속수무책 노출돼 있는 상태이다.

그럼에도 한국과 대만을 반도체 생산기지로 삼고 아슬아슬하게 돌아가고 있는 세계 경제의 현실은 더없이 불안하다. 한국과 일본은 오직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맺고 있기에 국제적 세력 균형을 유지해 올 수 있었다. 만약 2차대전 직후 미국이 미래의 세계 체제를 설계할 수 있었다면, 절대로 반도체 생산기지를 한국과 대만에 집중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만 해도 한국과 대만이 오늘처럼 성장하리라곤 누구도예측할 수 없었다. 이른바 “애치슨 라인”이 말해주듯, 미국은 2차대전 이후 공산 진영의 팽창정책에 맞서서 서태평양 일대에 일본에서 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느슨한 자유의 벨트를 마련했을 뿐이었다. 일본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필리핀으로 이어졌던 자유의 방어선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휴전선과 대만 해협까지 나아갔다. 인해전술로 밀려든 중공군과의 치열한 전쟁을 치른 대가였다. 바로 그 점에서 한국전쟁이 세계사적 영향은 두 세대에 걸친 한국과 대만의 발전사에서 극적으로 확인된다. 여전히 가장 큰 문제는 북·중·러와 미·일 사이에서 중간자 외교를 펼치려는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비현실적 국제인식과 미숙한 외교정책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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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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