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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1 (토)

성폭행 저항하다 18세에 옥살이… 78세 돼서야 재심 길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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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 혀 깨물고 징역형 받은 최말자씨

“뒤집힌 정의 바로잡을 기회에 감사”

조선일보

성폭력 가해자에게 저항하다 그의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로 중상해죄 판결을 받은 최말자씨.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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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한 방울 한 방울이 바위를 뚫었습니다.”

미소를 짓는 최말자(78)씨의 얼굴엔 60년 세월의 회한이 감돌고 있었다. 최씨는 1964년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중상해죄로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른바 ‘강제 키스 혀 절단 사건’의 당사자다.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아 6개월 간의 옥살이도 했다.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당시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지난 18일 최씨의 재심(再審) 청구를 기각한 원심 결정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18세 소녀가 78세 노년이 돼서야 억울함을 법정에서 다시 호소할 수 있게 됐다.

최씨는 20일 서울 중구 정동의 한 건물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여성 인권 운동가들과 취재진에게 “이 영광을 여러분께 돌리고 싶다”며 “제가 이야기를 하려면 책을 내도 모자라고 하루 종일 해도 모자랄 것”이라고 했다. 최씨 법률대리인 김수정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도 “뒤집힌 정의를 바로잡을 기회를 갖게 돼 기쁘다”고 했다.

최씨는 1964년 5월 6일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 노모(당시 21세)씨의 혀를 깨물어 1.5cm 자른 혐의(중상해죄)로 부산지법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성폭행에 저항한 정당방위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씨에겐 강간미수죄를 제외한 특수주거 수주거침입·특수협박 혐의만 적용돼 최씨보다 가벼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이 사건은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로 형법학 교과서 등에서 비중 있게 다뤄졌다. 법원행정처가 법원 100년사를 정리하며 1995년 발간한 ‘법원사’에도 소개됐다. 최씨는 2010년대 말 ‘미투 운동’이 확산하는 모습을 보며 용기를 얻었고 2020년 5월 재심을 청구했다. 사건 발생 56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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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가해자에게 저항하다 그의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로 중상해죄 판결을 받은 최말자씨가 20일 오전 서울 중구 상연재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여성의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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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5월 6일, 그 날 이후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최씨는 1946년 경남 김해시 대동면의 한 농가에서 1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딸만 연달아 셋이 나오자 집안 어른들의 실망이 컸다고 한다. 딸은 이제 그만 나오라는 뜻에서 그에게 ‘말자(末子)’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한다.

어른들의 바람대로 최씨 바로 밑에 남자 아이가 태어나자 그제야 집안에서 이쁨을 받았다. ‘사내를 가져다준 복덩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최씨는 어린 시절 유독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언니 두 명과 마찬가지로 초등학교까지만 보내고 중학교는 보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1964년 5월 6일 오후 8시쯤, 당시 18세였던 최씨는 김해 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친구 둘이 대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남은 떡을 주려고 최씨 집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웬 모르는 남자(가해자 노모씨, 당시 21세)가 친구들을 쫓아왔다고 한다. 친구들이 최씨 집으로 들어왔는데도, 노씨는 자꾸 “할 말이 있다”며 “친구들을 불러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최씨는 ‘나가기 싫다’는 친구들을 대신해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길을 알려달라”는 노씨를 데리고 동쪽 논두렁길로 걸었다. 최씨가 “큰 길을 따라 나가라”며 길을 알려주고 뒤를 도는 순간, 노씨는 최씨의 양 어깨를 잡고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이내 노씨는 최씨 배 위에 올라타 키스를 시도했다.

최씨는 몸부림을 치며 노씨를 밀치며 저항했다. 도망치고, 붙잡히고, 바닥에 넘어지길 세 번이나 반복했다고 한다. 최씨는 “두 번째까지는 정신이 있었는데 세 번째에는 땅에 머리를 부딪혔는지 정신을 잃었다”고 했다. 한참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노씨는 사라져 있었다. 당시 자신이 노씨의 혀를 잘랐다는 사실도 몰랐다고 했다. 그는 “당시 입 안이 뭐가 이상해서 그걸 뱉어내고 집으로 뛰어갔다”고 했다.

며칠 뒤 가해자 노씨는 자신의 친구들을 데리고 최씨의 집을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고 한다. 친구 열 명을 데리고 온 노씨는 부엌 식칼로 마루를 내리찍으며 “나를 불구로 만든 책임을 져라” “죽여버리겠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혀가 잘린 데 대한 보상으로 마구간에 있는 소를 가져가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최씨 가족들은 노씨를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로 고소했고, 노씨는 중상해죄로 최씨를 맞고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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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가해자에게 저항하다 그의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로 중상해죄 판결을 받은 최말자씨가 20일 오전 서울 중구 상연재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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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웠던 경찰과 검찰 조사, 그리고 6개월의 옥살이

최씨는 경찰 조사 과정을 받는 과정에서 심정적으로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조사 과정에서 경찰은 최씨에게 가해자와의 결혼을 종용했다고 한다. 이후 검사와 판사도 똑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경찰서를 오갈 때마다 최씨를 본 마을 사람들은 수근거렸다고 했다. “가시나가 뭘 어쨌다” 하면서 욕설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최씨는 “누구한테 힘들다는 말을 할 수도 없어 죽어야겠다고 여러번 생각했다”고 했다. 물에 빠져 죽으려고 낙동강 강가에도 가고, 약국마다 다니며 수면제를 잔뜩 사와서 자살 시도까지 했다.

얼마 뒤 사건이 검찰로 넘어갔다는 통보를 받고 조사를 받으러 검찰청에 갔는데, 그날로 최씨는 구속되고 말았다. 당시 검사는 구속영장을 제시하지 않았고,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나 진술을 거부할 권리 등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최씨는 수갑을 찬 채 한 평쯤 되는 좁은 방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했다. 최씨는 “조사관이 구둣발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나를 죽일 듯이 쳐다봤다”고 했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계획했냐” “일부러 그랬냐”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것 아니냐” 등의 폭언이 이어졌다고 했다.

조사는 밤이 되어서 끝났고, 이후 최씨는 포승줄에 묶여 버스를 탔다. 당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는데, 내려보니 부산교도소였다고 한다. “죄수복을 갈아입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대로 6개월 동안 구속 수사를 받았다. 이후 검찰은 최씨를 중상해죄로 기소했다.

최씨와 달리 가해자인 노씨는 일찍 풀려났다. “혀가 잘려 벙어리가 된 정상을 참작한다”는 이유였다. 노씨는 특수주거침입 및 특수협박죄로만 기소됐다. 강간미수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다. 이후 노씨는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당시 판사는 “소리를 지르면 주위 집에 들릴 수 있었다” “범행 현장까지 따라나섰다”며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재판부는 “(가해자인 노씨를) 일생 말 못 하는 불구의 몸이 되게 했다”며 실형을 선고했다.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최씨는 석방됐다. 최씨는 “석방 당시의 심정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못했다”며 “구속 당시 입었던 옷을 입고 들판과 산길을 따라 아버지 뒤를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최씨는 이후 이 사건과 관련해 입을 닫고 살았다. 그 누구와도, 심지어 가족과 친구와도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최씨는 석방된 이후 3개월 동안 집에만 있었다고 했다. 도저히 밖으로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다가 시내에 방을 얻어 한 달을 살면서 조금 용기를 얻어 다시 집으로 돌아와 2년을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결혼하면 다 좋아질 것”이라며 최씨를 결혼시켰다. 이후 아들까지 낳았으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결국 “결혼생활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남편과 이혼했다.

이후 최씨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온갖 일을 했다. 와이셔츠 공장에서도 일하고, 미싱 기술로 구포시장에서 옷 수선도 했다. 바닷가에서 손수레를 끌며 커피와 라면을 팔기도 하고, 인테리어 공사장에서 벽지를 바르는 보조 일도 했다고 한다. 힘든 세월을 버티며 최씨는 ‘언젠가 때가 되면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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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전경.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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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시작한 공부, 그리고 56년 만의 재심 청구

최씨가 63세였던 2009년 어느 날, 여동생에게 전화가 왔다고 한다. 나이든 사람들도 공부할 수 있는 학교 광고를 신문에서 봤다는 내용이었다. 최씨는 다음 날 곧바로 학교(부산 사하구 소재 보경보건고등학교)를 찾아가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4년 만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마쳤다.

이후 최씨는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에 부산 방송통신대학교를 찾아갔다고 했다. 최씨는 “학교에서 상담을 받는데 문화교양학과를 가라고 추천을 해줬다”며 “그게 뭔지도 모르고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2019년 8월 대학을 졸업했다. 여성의 삶과 역사에 관한 졸업 논문도 썼다.

최씨는 방통대 수업을 듣던 도중 ‘성 사랑 젠더’라는 교재를 보자 그동안 가슴에만 묻어두고 있던 과거의 일들이 문득 떠올랐다고 한다. ‘그동안 쌓였던 마음 속의 한(恨)’을 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최씨는 자신이 쓴 글을 방통대 같은 과 동기회장에게 보여줬다. 이를 본 동기회장은 “이걸 어떻게 여태까지 참고 살았냐”며 최씨를 끌어안고 울었다고 한다.

동기회장은 최씨에게 “서울로 가자”고 했고, 최씨는 그와 함께 서울 은평구에 있는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을 찾아갔다고 한다. 이때 자신 사건에 대한 판결문도 처음으로 읽어봤다고 한다. 이후 ‘판결이 부당하다’는 최씨의 확신은 더욱 커졌고, 결국 최씨는 사건 56년 만인 지난 2020년 5월 법원에 재심 청구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결국 사건 60년 만에 재심에서 다툴 길이 열렸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이번 재심 결정은 성범죄 피해자들의 자기 방어권을 인정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했다. 최씨의 법률대리인을 맡은 김수정 변호사(법무법인 지향)은 “뒤집힌 정의를 바로잡을 기회를 갖게 돼 기쁘게 생각한다”며 “내년에는 반드시 무죄 판결을 받아내기 위해 끝까지 힘쓰겠다”고 했다.

[고유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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