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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부호보다 선교사” 새문안교회·연세대 세우고 청년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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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선교 140주년 美 현장을 가다]

[3·끝] 언더우드와 그로브 교회

조선일보

1885년 처음 조선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중 한 명인 호러스 그런트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가 출석했던 뉴저지 그로브 개혁교회. 언더우드는 1916년 요양차 돌아왔던 미국에서 별세한 뒤, 그리던 조선 땅으로 돌아가기까지 83년을 이곳 고향 교회 묘지에 묻혀 있었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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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선교사, 32년간의 성공적인 사역을 마치고 그의 보상을 받다.’

11월 초 미 동부 뉴저지주의 노스 버건 마을, 소박한 주택들이 늘어선 서민 동네 언덕바지에 그로브 개혁 교회가 있다. 교회 묘지엔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의 이름 등을 간단히 새긴 비석이 누렇게 변한 늦가을 잔디 위에 놓여 있었다. 건강 악화로 요양차 귀국한 고향에서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16년 소천할 때, 그의 소원은 조선 땅에 묻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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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미국 뉴저지주 뉴브런즈윅신학교 도서관 내 언더우드 흉상 앞에서 이 대학 김진홍 석좌교수가 이곳을 졸업한 언더우드가 이곳에서 조선 선교를 결심하게 된 과정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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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소원은 사후 83년간 이뤄지지 못했다. 형제들이 의논해 그의 시신을 조선으로 옮기는 대신 그 돈을 언더우드가 세우고 돌아온 조선의 학교들을 지원하는 데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1999년에야 마침내 그의 몸은 한국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자리 잡았다. 고향 마을 교회 언덕엔 비석 하나만 남았지만, 그의 30여 년 헌신은 한국에서 놀라운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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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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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그로브 개혁교회 묘지에 남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석. 유해는 그가 소천한지 83년 만인 1999년 한국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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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백만장자보다 조선의 선교사”

언더우드는 1885년 제물포를 통해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조선에 온 첫 개신교 선교사였다. 조선에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1898년 뉴욕에 있는 큰형 존(1857~1937)의 편지가 도착했다. 1896년부터 ‘언더우드 타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사업이 날로 번창하자 동생에게 “뉴욕으로 돌아와 사업을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함께 함경도 전도 여행을 떠났던 캐나다 의료 선교사에게 그 편지를 보여준 뒤, 주저 없이 찢어버리면서 말했다. “뉴욕에서 백만장자로 사는 것보다 한국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선교사로 사는 것이 더 멋진 삶 아니겠소!”

동생은 대신 형에게 한국 선교를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형은 1901년 발표한 타자기 ‘언더우드 5호 모델’이 큰 인기를 끌면서 이후 20년간 200만대 이상을 판매하는 성공 가도에 막 들어선 참이었다. 형은 동생의 편지를 받고 학교 부지 20만평 구입 자금 5만3000달러를 보냈다. 지금 연세대학교는 이 돈으로 산 땅에서 시작됐다. 형이 이후에 추가로 보낸 10만달러로 세운 건물은 지금 연세대 본관인 석조 건물 언더우드관이다. 건강 악화로 미국으로 돌아가기 1년 전인 1915년, 언더우드는 자신이 설립한 경신학교에 대학부를 열어 연세대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다.

◇”형은 당대의 ‘스티브 잡스’”

언더우드가 졸업한 뉴저지 뉴브런즈윅 신학교는 당시 미국 해외 선교 열기의 중심이었다. 언더우드는 이곳에서 인도 선교사의 꿈을 키우다 조선으로의 소명을 자각했다. 이 대학의 김진홍 언더우드 석좌교수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은 그 시대의 ‘스티브 잡스’ 같은 사업가였다”고 설명했다. 140년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도서관 건물과 서가 등은 언더우드가 공부하며 해외 선교의 뜻을 굳혔던 당시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고 있다. 도서관 한편엔 한국 연세대에서 2011년 마련한 언더우드 기념물도 설치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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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의 모교인 뉴저지 뉴브런즈윅 신학교 도서관 내에 마련된 흉상과 기념 공간.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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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질 것이라 말하라”

조선에서 그는 국왕부터 천민까지 모두 만났고, 의주까지 목숨을 건 전도 여행을 세 차례나 다니며 거리에서 전도했다. 1886년 훗날 경신중·고가 되는 고아원을 세웠고, 그해 거둔 조선 아이 10명 중 몸이 너무 허약했던 한 아이가 훗날 임시정부 외무총장과 부주석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규식(1881~1950)이었다. 언더우드는 성경을 번역하며 1890년 최초의 한영·영한사전을 출판했고, 1897년엔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세웠다. 이 놀라운 추진력은 그의 집안 내력에서 왔다.

영국 출신 이민자로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던 언더우드 집안의 가훈은 ‘불가능은 웃어넘겨 버리고, 그 일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 말하라.’ 해외 선교를 꿈꾼 부모는 5남매 중 가장 똑똑했던 셋째 호러스 언더우드에게 집안의 모든 지원을 집중, 교육했다. 선교는 언더우드 가족 모두의 소명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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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언더우드가 출석했던 뉴저지의 그로브 개혁 교회는 개축돼 옛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스티브 게르모소 담임 목사는 “우리 교회는 이 지역 이민자 커뮤니티의 중심 역할을 하며, 언더우드의 삶은 지금도 이 지역사회에 모범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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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언더우드가 출석했던 뉴저지의 그로브 개혁 교회는 개축돼 옛모습이 남아 있지 않지만, 교회 지하에는 옛 건물의 부속 예배실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설교단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젊은 언더우드가 해외 선교의 뜻을 세우고 기도했을 자리다. 11월 초 방문했을 때 이 교회 스티브 게르모소 담임 목사는 “우리 교회는 이 지역 이민자 커뮤니티의 중심 역할을 하며, 언더우드의 삶은 지금도 이 지역사회에 모범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13살 때인 1872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온 언더우드가 1885년 조선으로 떠나기 전까지 미국에서 산 기간은 13년. 훗날 조선에서 선교한 기간은 30년이 넘었다.

/노스 버건·뉴브런즈윅(뉴저지)=이태훈 기자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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