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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2030 플라자] 자격증, 뭣이 그리 중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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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 강연 갈 때마다 자주 얘기한다. 내 세대는 공고 가면 망하는 줄 알았다, 나 또한 20대 내내 대학 안 간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10년 일해도 월급이 최저 시급에서 바뀌질 않더라, 선배들은 돈 되는 기술을 독점하고 안 가르쳐줬다, 어디 다치면 참든가 회사 관둬야 했다, 그런데 요즘 상황이 바뀌었다, 현장직 괜찮다, 당장 대기업 못 가도 경력 쌓아 들어갈 방법이 많으니 기죽지 마시라, 여기까지 모두 학생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립서비스가 아닌 현실이다. 근본적으로 수요 공급이 안 맞기 때문이다. 블루칼라 대우가 워낙 열악했기 때문에 유입이 거의 없던 반면, 선배 세대는 줄줄이 정년 퇴임하고 있다. 자동화 기술 발전은 인력을 완벽하게 대체하지 못했고 되레 사무직 목에 칼을 들이밀고 있다.

대기업 현장직 문이 옛날보다 비교적 자주 열린다. 좀처럼 사람 부족할 일 없어 결원을 인맥으로 알음알음 메꿔왔던 지역 중견 기업의 공채도 이따금 보인다. 하청 노동자가 원청으로 가는 일 또한 늘어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정말 어림없는 일이었다. 정규직 달고 싶다는 희망을 원청 업체 선배들한테 슬며시 내비치면, 버텨도 자리 안 나니 얼른 딴 회사 알아보라는 대답만 돌아오기 일쑤였다. 근데 이젠 좁게나마 밑에서 위로 올라갈 계단이 생겼다.

물론 가장 바람직한 현상은 원청을 더 채용할 게 아니라 원·하청 격차를 아예 줄이는 일이다. 하지만 차이를 당장 메꿀 수는 없으니 하청 경력직을 뽑는 기업 처지도 이해한다. 다만 이조차 원청이 선호하는 하청 경력직 기준이 너무 높다. 경력은 물론이고 업무 유관 자격증과 사내 평판까지 두루 갖춰야 한다. 경력과 평판은 회사 안의 문제지만 자격증은 다르다. 소위 ‘먹어주는’ 자격증을 따려면 독학만으론 어림도 없다. 필기는 여차저차 외워서 따더라도 실기에서 막힌다. 결국 사설 학원에 다니며 노동하고 관련 없는 순수 노동자 개인의 노력을 투입해야 한다. 우스운 점은 채용 관리자와 실무자들도 자격증 취득자가 곧 현장 노동의 프로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경력직에게 자격증을 요구할까. 내가 채용 관리자가 아니니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구직자 눈엔 그저 기업이 성실함과 절박함을 알아서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태도로만 보인다. 노동자는 현장에서 일하고 집 돌아와서 시험까지 챙기려면 최소 몇 달간 일과 공부만 해야 한다. 주말에 제대로 쉬지도 못 한 채 적지 않은 사비와 시간까지 들인다 한들 자격증은 확정으로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이 탓에 현장에서도 내로라하는 ‘독한 사람’만이 자격증을 따낸다. 이런 ‘독한 사람’만 원청 노동자로 채용하는 쪽이 기업에 이익일까?

물론 성실함을 입증한 사람들이 일도 더 잘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다만 내 경험상 현장에서 날고 기는 빠꼼이들은 자격증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중엔 자격증을 책상물림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나 역시 산업기사 자격증 두 장 들고 있지만 변수가 한가득한 현장에선 시험으로 얻은 지식이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격증은 기술 능력 보증서가 아니라 퇴근 후 사생활까지 기꺼이 버릴 수 있고, 필요하면 날밤을 새우는 돌관 작업도 마다하지 않으며, 오로지 회사에만 충성하는 산업화 세대의 ‘근로자 증명서’라고 보는 쪽이 옳지 않은가. 실무 변별력 떨어지는 자격이 당락을 결정할 요소여야 할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일할 사람 없어서 난리라더니 왜 사람 뽑는 방식은 구닥다리인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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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현우 용접공·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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