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09 (토)

수박 농사 짓다 우주 공학… 농부처럼 공부하라, 결과는 정직하리니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무튼, 주말]

[정상혁 기자의 행각]

러시아도 놀라게 한 열정

‘만학도 전설’ 공근식 박사

1992년 발행된 농업 잡지 ‘농진종묘’에는 직접 수확한 수박 한 통을 든 채 활짝 웃는 농부 공근식(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씨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수박! 이제 상품성으로 선택하십시오”라는 다소 투박한 광고 문구와 함께. 스물두 살 때였다. “아, 이때 저희 밭에서 수박 품평회를 했어요. 비닐하우스도 아니고 노지(露地) 농사였는데 무늬도 선명하고 크기도 컸거든요. 고등학교 중간에 그만 두고 5년 지났을 때네요.”

이로부터 24년 뒤, 러시아 최고 명문 모스크바 물리기술원(MIPT) 학술 잡지 ‘자유로운 비행’에 이 사진이 다시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한국에서 수박 농사 짓던 남성이 러시아에서 우주 항공을 배우고 있다”는 소개 기사였다. 마흔여섯 살 때였다. 변변한 경력은커녕 외국어도 서툴렀던 시골 농부는 이후 학부 과 수석, 석사 전체 수석을 차지했고, 2022년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참고로 밝히자면 ‘러시아의 MIT’로 불리는, 노벨상 수상자만 10명을 배출한 학교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격언,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만학도의 전설’ 공근식(54) 박사가 있기 때문이다. 수년 전 일부 지역 매체에 소개된 그의 인생 역정이 수능 시즌을 앞두고 소셜미디어에 급속히 확산됐다. TV 예능에도 출연했다. ‘하면 된다’ 정신의 표본. “이런 사람이 있으니 변명도 못 하겠다”는 뭇 수험생의 뜨거운 감탄. 근황이 궁금해 지난달 아침 전화를 걸었다. 저녁에야 답신이 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느라 핸드폰을 지금 봤다”고 했다.

◇열일곱, 공부가 너무 싫었다

조선일보

러시아 학술지 '자유로운 비행'에 소개된 공근식 박사. 왼쪽 페이지에는 1992년 '농진종묘'에 실린 그의 농부 시절, 오른쪽에는 러시아 MIPT에서 공부하는 모습이 실렸다. /정상혁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의 연구 분야는 극(極)초음속이다. 마하1은 음속, 그러니까 시속 1224㎞다. 마하5 직전까지 초음속, 마하5부터 극초음속이다. 시속 6120㎞ 이상. 그는 마하20 너머를 시뮬레이션한다. 주로 미사일 같은 우주 발사체 설계와 관련된 초고속 세계. 그러나, 곧 서술하겠지만, 그의 시작은 무척 늦었다.

–요새 뭐 하세요?

“MIPT 박사후연구원 확정이 났는데, 작년에 귀국했어요. 전쟁 때문에요. 연구실 자금이 끊겼거든요. 외교 관계도 불안해졌고요. 지금은 혼자 논문 쓰고 있어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발표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화제의 인물이 됐습니다.

“병원 간호사들이 알아보시고, 아까 지하철에서도 유튜버라는 사람이 말을 걸더라고요. 제가 걸어온 경로가 독특하긴 하죠….”

–학업을 일찍 접으셨는데요.

“철이 없었죠. 수학은 좋아했어요. 골똘히 풀면 되니까요. 나머지는 관심 밖이었어요. 외우는 게 너무 싫었어요. 성적은 형편없고, 대학 가기는 글렀고…. 고2 때 그냥 ‘집안이 어렵다’ 둘러대고는 그만뒀어요.”

–뭘 하셨나요.

“부모님 일손을 도왔습니다. 수박 농사를 지었어요. 농사는요, 아무리 잘돼도 돈을 못 벌 때가 있어요. 오르내림이 심해요. 그만둘 수도 없었어요. 아버지가 뇌경색을 앓으셨어요.”

가방 대신 비료 포대를 멨다. 삼형제 중 장남, 뒷바라지한 두 동생이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하는 동안 그의 학력은 줄곧 ‘옥천고 중퇴’였다. 불편한 건 없었다. 야망도 없었다. 다만 갈증이 생겼다. “가끔 수박 팔러 대전 시내에 나가면 서점에 들러 책을 뒤적이곤 했다”고 말했다.

–무슨 책이었나요.

“수학책이나 과학책 같은 거요. 저희 수박 밭 앞에 금강이 흘렀어요. 쉴 때마다 강을 바라봤어요. 저 물살은 얼마나 빠를까, 여울은 왜 생기는 걸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범상치는 않았네요.

“증세가 점점 심해졌어요. 농사 10년쯤 하니 흥미도 줄고… 이게 맞나 싶었습니다. 대전 공판장에 수박을 출하하는데, 제가 차가 없었어요. 배달 업체 용달차 타고 같이 갔다가, 집에는 혼자 기차로 왔죠. 그러다 대전역 입구 게시판에서 눈이 딱 멈췄어요.”

◇夜學에서 카이스트까지

조선일보

지난 2016년 귀국해 모교 배재대 박종대 교수(오른쪽)와 만난 공근식 박사. 배움의 길을 열어준 은사다. /배재대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전단이었다. ‘성은야학’ 개강 안내문. “그날 집에 안 들어갔어요. 홀린 듯이 야학까지 걸어갔습니다. 역에서 가까웠어요.” 스물여덟 살, 야학에서는 막내였다. “많을 때는 학생이 열댓 명 됐는데요, 주로 어르신이었죠.” 당시 대전 카이스트(KAIST) 박사과정 학생들이 자원봉사 교사로 있었다. 이수석·박현철·신건철…. “내 인생을 바꿔준 평생의 은인”이라고 했다.

–수업이 재밌었나요?

“1년 6개월 과정이었는데요, 저는 5년 다녔어요. 너무 좋아서요. 주로 검정고시 준비 돕는 강의였죠. 평일 저녁 6시에 시작하니까 낮에 기차 타고 가서 수업 듣고, 야학에서 쪽잠 자고, 새벽 첫차 타고 집에 왔어요. 매일.”

모터에 발동이 걸리니 멈출 수 없었다. “집중하는 게 그렇게 좋더라고요. 좀 더 가르쳐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수학과 과학. 주말에도 야학에 갔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반물리·고전역학 등을 카이스트 박사들에게 배웠다. 최고 두뇌들에게 공짜 일대일 과외를 받은 셈이다. 다만 이쯤에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이해가 잘 되던가요?

“선생님들이 설명을 쉽게 잘 해주셨어요.”

–천재, 그런 거 아닙니까?

“어휴 절대로 아닙니다.” 그는 무척 겸손하고 진중했지만 가끔 말을 버벅거렸고 “대화 도중 상대방 질문을 곧잘 까먹기도 한다”고 말했다. “IQ 검사 같은 건 받아본 적도 없어요.”

세 선생님이 학교를 졸업할 때쯤, 그도 검정고시를 치렀다. 내친김에 수능도 봤다. 집에서 가까운 배재대 전산전자물리학과에 붙었다. 수박 농사를 병행해야 했다. 배재대 박종대 교수는 당시 서른네 살의 공근식을 이렇게 기억했다. “질문이 많았어요. 수업 끝나면 꼭 찾아왔어요. 순수물리학 쪽에 관심이 깊더라고요. 물리학은 근본을 따지다 보니 답이 없는 것도 있거든요.”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박 교수가 카이스트 측에 연락했다. “공부에 의지가 강한 학생이 있다”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

조선일보

우주선 콘셉트의 공간에서 공근식 박사가 팔짱을 낀채 웃고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듬해부터 그는 카이스트 물리학과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청강생 자격이었다. 새벽에 밭으로, 낮에는 학교로 갔다. “좀처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수업 범위가 훨씬 넓고 빨랐거든요.” 보충 수업이 필요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옆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부탁에 능했다. 배움에 거침이 없었다. 이틀 뒤 카이스트 옆 충남대로 무작정 향했다. 물리학과 교수실로 갔다. 마침 박병윤 교수가 있었다. 당연히 일면식도 없는 사이. “처음 뵙겠습니다. 이 대학 학생은 아니지만 강의를 청강하고 싶습니다.” 박 교수가 대답했다. “아, 그럼 그러세요.” 몇 번의 퇴짜, 몇 번의 허락. “제가 인복(人福)이 있나봐요.” 2년 동안 매일 카이스트와 충남대를 오가며 공부했다.

–힘들지는 않았나요?

“그저 시간이 아쉬웠죠. 어머니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시간을 너무 뺏겨서 작물을 바꿨어요. 수박 대신 알타리무. 아무래도 손이 덜 가거든요.”

이 무렵 MIPT 소속 연구원 두 명이 한국에 왔다. “배재대에서 진행하던 연구 프로젝트 초청자였어요.” 그는 또 달라붙었다. “혹시 가르침을 더 받을 수 있을까요?” 일주일에 한 번, 4시간씩 빈 강의실에서 물리학 수업을 받았다. “제 영어가 서툴긴 해도 칠판에 쓴 수식(數式)을 보면 감을 잡을 수 있었어요.” 그가 당시 배운, 지금도 인상 깊게 기억하는 물리학 개념은 포텐셜 에너지(Potential Energy)다. 위치와 관련된 에너지, 그러나 경로와는 무관한 잠재력. 그는 이 단어를 좋아했다. 2010년, 태풍이 몰아쳤다.

–큰 태풍이었나요?

“비닐하우스가 전부 물에 잠겼어요. 철골은 다 우그러지고…. 그때 결심했죠.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

◇처절한 실패… 공항에서 혼자 울었다

조선일보

2017년 러시아 지역 매체 주코프스키 뉴스에 소개된 공근식 박사.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생애 첫 유학을 결심했다. 행선지는 러시아. 과학 강국, 연구원의 추천, 금전적 이유도 있었다. “부모님은 북한이랑 가깝다고 걱정하셨죠.” 이번엔 두 동생이 형을 도왔다. 그렇게 2012년 예비 학부에서 러시아어(語)를 공부했고, 이듬해 MIPT 물리공학과 입학 허가가 났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벽한 실패였다. “나이가 많아서 그랬는지…. 몇몇은 제가 산업 스파이인 줄 알았대요. 학생들과 어울리지도 못했고, 일단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었습니다. 오죽하면 시험 날짜를 몰라서 시험을 못 본 적도 있어요. 핑계라면 핑계죠.”

–그래서….

“퇴학이었죠.”

한 학기 만에,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모스크바 공항에서 인천행 비행기 기다리는데요, 하, 온몸이 축 처져서는…. 창피하기도 하고 눈물도 조금 났어요. 이제 다시 농사나 지어야겠구나.” 3개월 뒤, 학교에서 이메일이 한 통 왔다.

–무슨 내용이었나요?

“해석이 잘 안 돼서 배재대에 계시던 고려인 교수님을 찾아가 번역을 부탁드렸죠. 읽어보시더니 한국말로 대뜸 그러셨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학교에서 다시 오라는데요?”

학과 변경을 조건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게 됐다는 안내문. 졸업 즈음 알게 된 것이지만, 나이 든 한국인 학생을 유심히 지켜본 노(老)교수 세르게이 파블로비츠 알닐루예프가 힘을 쓴 덕분이었다. “제가 그 교수님 수업을 청강한 적이 있거든요. 운 좋게 시험 점수가 잘 나오긴 했는데, 청강생 신분이니 의미는 없었죠. 그런데 종이에 메모를 하나 써주셨어요. ‘2011년 6월 30일 양자역학 시험 통과. 다음 수업은 9월 3일 시작되니 오시오.’ 제가 안 보이니 학교에 알아보셨나 봐요.”

–많은 분의 도움이 있었네요.

“고비마다 항상 이끌어주는 분이 계셨어요. 저는 종교가 없지만 가끔 생각해 보고는 합니다. 인생이라는 게 혼자 독불장군처럼 살아서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절실하면 누군가 반드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이듬해 항공공학과 학생이 됐다. 러시아 회화 교재를 바리바리 싸들고 다시 주코프스키시(市)로 떠났다. ‘러시아 항공의 아버지’로 통하는, 세계적 우주 공학자 이름을 딴 도시.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은 공부만 했습니다. 수업 내용을 스마트폰으로 녹음해서 잠들 때까지 반복해서 들었어요. 땅이 워낙 넓으니까 교수님들 사투리가 심해요. 그냥 듣고 또 듣고….” 음식이 입에 안 맞아 기숙사에서 묽은 된장국을 끓여 먹으며 버텼다. 하루에 3시간씩 잤다. 3학년부터 모든 과목 A를 받았다. 처음으로 장학금(러시아 정부)을 받게 됐다.

◇치아가 다 빠졌다, 그래도 이를 악문다

석사과정에 들어선 2017년, 러시아 지역 신문 주코프스키 뉴스에 그를 다룬 큼지막한 기사가 실렸다. “전직 한국 농부가 모스크바 물리기술원에서 학업을 완수하고 있습니다… 젊지 않은 나이지만 그는 매우 부지런한 학생입니다. 끈기와 집중력이 그의 특징입니다. 그의 도움으로 우리는 극초음속 분야에 관심 있는 한국 기업들과 협력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공부의 비결이라면요?

“제가 농부였잖아요. 일단 새벽 일찍 일어나요. 고요하고 머리도 팽팽 잘 돌아가요. 능률이 높죠. 러시아는 겨울이 길거든요. 춥고, 졸리고, 수업 가기 싫죠. 그래도 이미 몸은 강의실로 움직이고 있어요. 농부가 밭 매러 가듯이요.”

–농부처럼 공부해야 하는군요.

“뿌린 대로 거둔다, 이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점심을 안 먹어요. 나이가 있다 보니 식곤증이 세게 와서요. 수학 올림피아드 대회에서 금메달 딴 10대들이랑 경쟁해야 하는데, 졸린 것보다 배고픈 게 낫죠. 지금은 습관이 됐어요.”

–다시 여쭙지만, 천재는 아닌가요?

“절대로요. 러시아에서 진짜 천재들 많이 봤어요. 머리 돌아가는 속도가 달라요. 뭐든 빨라요. 근데 포기도 빨라요. 저는 느리지만 계속하고 있을 뿐이고요.”

그의 박사 논문은 ‘화성 대기에서 하강하는 우주선 주변의 변화’를 다룬다. 지금도 천착하는 주제다. “탐사선이 행성 대기권을 뚫고 진입할 때 지상 45㎞ 부근이 가장 뜨거워요. 거의 다 왔는데, 이제부터 가장 거센 압박을 견뎌야 하죠. 제가 연구하는 건 이때 발생하는 온도와 압력값, 기체 분포 계산이에요. 무사히 착륙할 수 있도록요.”

–모든 건 결국 ‘버티기’네요.

“지금 제가 치아가 거의 없어요. 박사과정 때 잇몸이 무너졌거든요. 심한 날은 하루에 3개가 빠진 적도 했어요. 지금은 틀니를 끼고 있어요. 다시 그렇게 공부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왜 그렇게까지 하셨나요.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까요.”

그리하여 그가 이룬 세속적 성취를 묻는다면 대답은 궁색해진다. 이를테면 그는 미혼이고, 직장도 없으며, 여전히 충북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에 살고 있다. “솔직히 고민이 됩니다. 한국 오자마자 ‘취업 어떻게 할 거냐’는 얘기부터 들었거든요. 그제야 고민이 화성에서 지구로 내려온 거죠. 그래도 재밌으니 괜찮아요. 일단은 하던 연구 마저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학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공부에는 때가 있어요. 맞아요. 늦은 나이에 공부하려니 정말 힘들었어요. 그런데요, 반복을 이기는 건 없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지치지 않는 거예요. 박사과정 때 들은 말인데요, 한국 학생들은 초반에 두각을 빨리 드러낸대요. 근데 갈수록 뒤처진대요. 중국이나 베트남 학생들은 정반대예요. 걔네는 자주 만나고 서로 묻고 토론하면서 공부해요. 한국 학생은 혼자서 하죠. 혼자 하면 빨리 지쳐요. 요새 가끔 길이나 도서관에서 ‘애들 공부 어떻게 시켜야 하냐’고 물어보는 학부모들이 계세요. 제 대답은 항상 이겁니다.”

–그럼 반응이 어떤가요?

“그거 말고 다른 건 없냐고….”

[정상혁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