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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화)

막걸리 할배, 전화 할배, 간판 할배…안 보이면 궁금해지는 동네 할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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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신회의 매사 심각할 필요는 없지]

내 산책길에 기쁨을 주는 동네 할아버지 1~3위

조선일보

일러스트=한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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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라는 말이 있다. 심리학적으로 번역하면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쾌락을 만끽하는 심리’라는데 사전적 정의가 그야말로 명쾌하다. ‘켕기는 즐길 거리.’ 우리 모두에게는 켕기는 즐길 거리가 있지 않은가. 떳떳하게 공개하긴 뭣하지만 분명 요즘의 나를 살게 하는 무언가, 혹시 나한테만 있나?

나의 길티 플레저 중에서 순한 맛 하나를 공개하자면, ‘동네 할아버지 관찰하기’다. 우리 동네에는 남다른 존재감을 자랑하는 ‘웃수저 할배 베스트 3′(순위는 내가 매겼다)가 있어서 집 밖을 나설 때마다 두리번거리게 된다. 한꺼번에 세 분을 목격하면 그야말로 행운이겠지만 그런 날은 이제껏 없었기 때문에 한 분이라도 마주치면 내적으로 쾌재를 부른다. 나는 도파민 중독자이고, 할배들은 마주칠 때마다 나의 도파민을 자극해 하루를 더 살게 해준다.

3위는 ‘막걸리 할배’다. 막걸리 할배는 동네의 커다란 공원에 줄줄이 이어진 벤치 중에 가장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벤치에 매일 앉아 있다. 날씨가 흐리건 무덥건 거기 앉아서 막걸리를 두세 병쯤 마신다. 술에 취해서인지 언제 마주쳐도 기분 좋아 보인다. 내가 반려견과 함께 산책할 때면, 내가 아닌 개에게 말을 건다. 개가 느릿느릿 걸으면 “빨리 엄마 따라가!”, 개가 너무 빨리 걷는다 싶으면 “아, 더워서 헉헉거리는 거 봐라!”, 딱 적절한 속도로 걷고 있다 느껴지면 “아, 고놈 잘도 걷는다!” 하신다. 매번 마주칠 때마다 덕담(!)만을 건네기 때문에, 평소 낯선 사람들을 보면 경계하는 우리 개는 막걸리 할배 앞에서만큼은 유난히 태평하다. 나 역시 벤치를 지나칠 때마다 웃으며 목례한다. 2~3일 보이지 않는 날은 내심 걱정되지만, 며칠 뒤 같은 자리에서 벌건 얼굴로 막걸리에 빠져든 모습을 보면 안도감이 흐른다.

2위는 ‘전화 할배’다. 전화 할배는 언제 봐도 통화를 하고 있다. 특이점은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휴대폰으로 통화한다는 거다. 우리 동네에는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가에 요즘 보기 어려운 공중전화 박스가 떡하니 서 있다.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안에 사람이 있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전화 할배는 꼭 거기에서만 만날 수 있다. 맨처음에는 ‘아, 요즘에도 공중전화를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하며 신기해했는데, 여러 번 보니 전화 할배는 굳이 공중전화 박스 안에 들어가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통화를 하는 것이었다. 가끔은 누군가를 걱정하는 대화를, 때로는 원망의 말을 쏟아내기도 하고, 다정하게 안부를 전하기도 하면서 공중에서(!) 스마트폰 통화를 하는 할아버지를 흘끔거리는 것이 나의 작은 낙이다. 그 할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우리 동네에 하나 남은 공중전화가 철거되어서는 안 된다. IT 강국이지만 공중전화 절대 지켜!

대망의 1위는 가장 존재감이 크지만 좀처럼 만날 수 없는, 나에게는 ‘할플루언서’ 같은 존재다. 그분은 ‘간판 할배’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간판의 내용에 걸맞은(!) 고함을 치며 동네를 휘젓고 다닌다. 예를 들어 교회 간판이 보이고, 마침 개를 끌고 가는 사람이 지나가면 외친다. “하나님! 저 개를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저 연약한 개를! 아무것도 모르는 개를…!” 할아버지의 한마디는 좀 전에 말썽부리는 개 때문에 속상했던 내 마음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뒤이어 ‘무슨무슨 커피’라는 간판이 보이면 이렇게 외친다. “한 집 건너 하나가 커피숍! 커피 마시지 말고 밥을 먹어라!” 무더운 산책에 지쳐 단골 카페로 피신 가는 길이었던 나로서는 내심 조금 뜨끔해진다. 간판 할배는 이런 식으로 눈앞에 보이는 간판과 지나가는 사람들을 임의대로 짝지은 후 촌철살인을 내뱉는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왜 저래…’ 하며 피했는데, 듣다 보니 외치는 말들이 묘하게 경종을 울리는 내용들이어서 어느새 안 본 척하며 유심히 지켜보게 되었다. 열심히 자전거를 타기 때문인지 피부는 건강하게 그을려 있고, 운동량 역시 상당한지 몸은 날렵하다. 하지만 요즘은 통 만나볼 수가 없어 아쉽다.

나에게는 할아버지가 없다.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 모두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좀처럼 할아버지들과 만나거나 대화할 기회가 없지만 동네의 웃할배 세 분을 마주칠 때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추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건 켕기는 즐길 거리가 아닌 훈훈한 취미가 되려나. 더욱이 웃수저 할아버지들에 대한 호감도 상승으로 가끔 대하는 난감한 할아버지들도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나에게 산책의 기쁨을 선사하는 할아버지들이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바란다. 막걸리 할배가 술을 적당히 드시기를. 전화 할배가 스마트폰 통화를 너무 오래 하시지는 않기를. 간판 할배가 자전거 운전하다 다치는 일이 없기를. 너무 오래 안 보이면 걱정되는 할아버지들. 내일은 오랜만에 간판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신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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