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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도자기를 화폭 삼아 그려낸 삶의 멋과 여유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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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포도문을 거품으로 표현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진환민 작가의 청화백자 거품포도문 항아리. 진환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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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비들이 마음을 뺏긴 풍류
정자·누각·매난국죽의 은은함
동화처럼 감상하며 작가와 소통



그림이 그려진 옛 도자기를 보며 글 없는 그림책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연꽃이 가득 핀 연못에서 물장난치는 동자의 모습이 새겨진 고려청자 대접은 한여름의 무성한 싱그러움이 가득한 그림책이 되고, 17세기 철화백자항아리에 그려진 장난스럽고 유머 넘치는 표정의 용에선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가 떠오른다. 못난 외모로 놀림을 받지만 마침내 세상을 구하는 멋진 용으로 승천하는 상상이다. 분청사기나 백자에 천진하게 그려진 각종 풀과 식물 그림은 어찌나 추상적이고 자유로운지 그림만 떼어내 당장 책으로 엮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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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작가가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회화 작업으로 장식한 ‘아뜰리에 유지’의 도자기 작품. 아뜰리에 유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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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도자기를 감상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시대, 재료와 제작 지역, 형태와 쓰임, 장식 기법 등 하나의 작품을 여러 갈래로 톺아볼 수 있어 알아가는 기쁨이 크다. 역사와 학술, 예술적 접근도 해보지만, 그림책처럼 상상하는 감상법은 우리 도자기와 한결 친숙해지는 비법이다. 만든 이와 소통하는 느낌이라 찬찬히 들여다보며 친해지는 것. 이런 감상법 덕분에 2023년 2월부터 5월까지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 전시를 비롯해 같은 해 가을, 꽃과 식물을 애호했던 조선 사대부의 취향을 담은 도자기를 소개한 호림박물관의 ‘조선양화_꽃과 나무에 빠지다’ 전시 등 도자기에 담긴 다채로운 그림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유독 반갑고 즐거웠다.





가는 선 세밀화도 시원해





최근에는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특별전으로 열리고 있는 ‘도자기, 풍류를 품다’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도자기가 품은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조선 선비들이 즐겼던 풍류의 공간과 서정을 탐구하는 이번 전시를 통해 그간 살피지 못했던 색다른 도자기 그림을 접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풍류 공간인 정자와 누각을 중심으로, 공간의 목적과 쓰임과 더불어 이런 건축물이 청화로 그려진 백자 유물이 먼저 눈길을 붙잡는다. 특히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의 19세기 작품인 ‘성과 요새 무늬 병’에는 높은 누각이 위세 등등한 성벽과 그 속에 평화롭게 자리한 마을을 지도처럼 그려 평화롭고 영화로운 일상을 염원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또한 조선 후기 문인들이 심취했던 다채로운 취미생활이 담긴 도자기 그림을 보며 그들의 풍성했던 취향과 시대상을 읽어낼 수 있었다. 화병과 분재 화분, 화려한 무늬의 두루마기와 괴석 등을 백자 접시와 주전자, 병에 빼곡히 그려 넣은 것을 보며 웃음이 배어 나왔다. 대부분 19세기 도자기인데, 이 시기에는 중국을 통해 국내에 들어온 고동 기물이나 문방구, 분재, 수석 등을 귀하게 수집하고 이를 친한 벗들과 모여 품평하는 것을 즐겼다. 이런 완상의 취미가 ‘기명절지도'라는 그림과 더불어 도자기에도 담긴 것이다. 검소함을 숭상해온 조선의 선비들이 어느덧 화려하고 진귀한 물건에 마음을 빼앗겨 하얀 백자에 가득 채워 바라보았다는 점이 오히려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조선 정원의 정수인 ‘소쇄원’(전남 담양)의 아담한 방 한 칸과 그곳에 머물렀을 문인의 취향을 담은 도자기와 문방구, 가구 등을 재현하고, 차와 술, 시를 즐겼던 조선 문인들의 풍류가 담긴 도자기를 유유자적 즐길 수 있도록 배치한 국립광주박물관의 특별전은 오는 9월 22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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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선으로 청아한 청화 그림을 백자에 그리는 정유나 작가의 접시와 개완. 박효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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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한 청화 그림이 그려진 정유나 작가의 청화백자도 나만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낼 수 있는 작은 그림책이다. 10~15cm 남짓한 작은 접시와 차를 우리는 개완과 찻잔 등에 파초, 국화, 난초, 매화와 벌 등을 아기자기하고 청초하게 그려 조선 문인 화풍을 계승한 20대 청년 작가의 짙은 심상이 엿보인다. 작은 화폭이다 보니 가는 선으로 세밀하게 표현하는데도 시원하고 유연한 특징이 있다. 옅은 농도의 푸른색이 어우러져 은은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도자기 작품 중 그림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부부 작가의 도예 브랜드 ‘아뜰리에 유지’의 작품에 그려진 김지은 작가의 그림이다. 흙의 마티에르(질감)가 유화의 거친 표면처럼 느껴지는 도자기 바탕에 신비롭고 환상적인 그림으로 채워진 작품을 보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늘 쓰임을 먼저 생각했던 도자기가 캔버스의 역할을 한 회화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남편 조유연 작가가 빚은 도자기를 화폭 삼아 아내 김지은 작가가 그림을 그린 접시는 액자가 되고 항아리는 입체 예술로 거듭난다. 아뜰리에 유지의 접시를 소장한 이들이 그릇으로 사용하지 않고 선반에 기대어 세워 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는데 그 마음이 이해되는 바이다. 서커스라는 주제로 삶과 인간관계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작품도 좋지만, 텃밭과 정원의 풍경을 인상파 작품처럼 그리거나 동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그린 ‘사라져 가는 것들'이라는 시리즈도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는 진정한 동화 그림책 같은 도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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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 넘치는 전통의 재해석





진환민 작가의 ‘청화백자 거품포도문’은 언뜻 보면 박물관에서 봄 직한 전통 청화백자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품으로 그린 독특한 작업 방식으로 완성했다. 청화 안료 거품을 초벌한 도자기에 불어넣어 비정형의 우연한 결과물로 포도나 용 등 전통적인 도자 문양을 새롭게 그려 구워낸다. 국보인 백자철화포도문 항아리에 자신만의 숨결을 불어넣는 과정을 담은 영상은 소셜 미디어에서 조회 수 4000만 회를 넘을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 전통을 재해석해 생기 넘치는 작품으로 표현한 영리함과 자유분방함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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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의 장식기법인 박지기법으로 나무 조각처럼 따뜻한 문양을 새긴 전하람 작가의 분청 접시. 전하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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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전하람 작가가 도자기에 박지기법으로 새긴 꽃과 나뭇잎, 열매 등의 문양이 마음을 봉긋하게 부풀린다. 박지기법은 분청사기에서 주로 문양을 새길 때 사용하는 방식이다. 도자기 바탕에 백토로 분을 바르고 그림을 그린 뒤 문양 이외에 바탕 부분의 백토를 긁어내고 유약을 발라 문양을 표현하는데, 전하람 작가의 분청 박지는 나무에 조각을 한 듯 따스한 감촉이 전해진다. 가을의 결실을 주제로 한 그림책의 한 페이지처럼 풍요롭고 서정적이다. 도자기를 동화처럼 읽고 그림책처럼 감상하는 천진한 감상법 덕분에 도자기 유물은 친근해지고 현대 도자 작가의 작품은 풍성한 감각으로 차오른다. 무엇보다 이름 모를 도공과 화원이 빚고 그린 언어가 다시 나만의 이야기로 펼쳐져 그들과 연결되는 경험은 자못 감동적이다.



글·사진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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