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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8 (수)

승승장구하던 부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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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나는 역사다] 한규복 (1881~1967)



1890년대에 영어와 일본어를 공부했다. 출세하기 딱 좋은 스펙이었다.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와, 1900년대에 번역관으로 대한제국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1908년에는 서기관도 겸직.



1910년 한일병합 뒤 조선총독부에 속한 공무원이 됐다. 승진하고 출세하는 것이 한규복 인생의 바람이었을까? 1913년부터 1934년까지는 지방 관리로 경력을 쌓았다. 일은 잘했나 보다. 진주군수, 동래군수부터 시작해 충청북도지사, 황해도지사까지 쑥쑥 승진했다. 1933년부터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를 지냈다. 중추원 참의는 조선총독의 자문을 하는 것 말고 실제 권한은 별로 없었지만, 한규복 같은 사람에게는 사회적인 위신을 확인받는 ‘명예로운 자리’였다. 사회 명사가 된 한규복은 일본 군대를 위문했고, 이른바 ‘국방 헌금’을 걷는 시국 강연회를 다녔다. 자기 행동이 어떤 의미였는지 모르지 않았으리라.



해방 직후 미군정청 고문에 임명되지만 사양했다. 공무원 생활을 더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대신 기업 경영을 시작했다. 회사를 세우고 사장이 되었다.



반민특위가 시작되었다. 1949년 8월에 한규복은 반민특위에 자수한다. 체포를 피하기 위함이었을까. 그러나 반민특위 활동이 흐지부지되면서 한규복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는다.



이후로 다양한 문화 활동을 했다. 한규복은 일찍부터 서예가로도 이름이 있었고, 한국화도 잘 그렸다. 해방 이후에도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고미술품 감정도 했다. 정치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1950년대에는 종친회 회장을 지냈고, 1960년대에는 잡지를 창간하고 필진으로 참여해 칼럼니스트 생활을 했다. 세상을 떠난 날이 1967년 9월13일.



한규복은 반민특위에 자수할 때, 자기가 열심히 공직 생활을 했다며 변명했다. 해방 전 자기 삶에 만족했을지 모른다. 해방 후 삶에 대해서는 어땠을까? 벌받지 않은 채 사람들 관심을 피해 문화생활을 누리며 만족했을까, 아니면 출세와 성공의 맛을 더 보지 못해 아쉬웠을까?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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