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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2 (목)

그는 정치암살 첫 희생자다…'중도파' 송진우 피살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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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타협 없이 대립으로 치닫는 오늘날의 정치 상황은 좌우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하던 해방정국 풍경과 닮았습니다.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25)입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가 인물 중심으로 해방 직후 한국 현대사를 인물 중심으로 들여다봅니다. 제 3부 '송진우와 장덕수'편 제 1화를 무료로 공개합니다.

'The JoongAng Plus(더중앙플러스)'는 지혜롭고 지적인 독자들을 위해 중앙일보의 역량을 모아 마련한 지식 구독 서비스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더중앙플러스 구독 후 보실 수 있습니다.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의 연재글을 중앙북스에서 단행본으로 엮었습니다. 서점과 인터넷에서도『해방정국의 풍경-인물로 돌아보는 대한민국 현대사』(중앙books)를 만나보시죠.

■ 제 3부 목차

〈제 3부〉 송진우와 장덕수, 중도파의 비극적 운명

① 송진우의 ‘찬탁론’ 와전됐다, 기어이 총을 쏜 광기의 시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0770

② 누가 장덕수를 암살했나…이승만·김구 그때 갈라섰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2422



전봉준 찾아가다 만난 송진우



1970년대, 나는 『전봉준(全琫準) 평전』을 집필하고자 호남 땅을 헤매고 있었다. 나는 전봉준이 태어난 곳에서부터 시작해 그가 살다가 일생을 마친 곳까지 모두를 답사했다. 그러는 데에 15년의 세월이 흘렀고, 그 작업을 마치기까지 5000㎞를 답사했다. 전봉준 생애의 최후 장면을 찾아 헤매다가 나는 그가 전남 장성 백양사(白羊寺)에서 마지막 이틀 밤을 지냈다는 기록에 따라 1981년 10월, 초겨울 밤비를 맞으며 그곳을 찾아갔다.

종무 스님에게 전봉준의 마지막 밤에 관한 흔적이라도 찾고 싶어서 왔노라고 말씀드렸더니 그 스님은 “오늘은 신도들의 법회가 있어 재워줄 방은 없고, 전봉준이 마지막 밤을 지낸 곳은 백양사가 아니라 이곳에서 2㎞ 떨어진 백양사의 말사(末寺) 청류암이니 그곳을 찾아가 보시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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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송진우가 독립운동의 뜻을 키웠던 전남 백양사 청류암 정경. 사진 신복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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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신도들의 법회가 있어 재워줄 방이 없다기에 나는 할 수 없이 밤중에 읍내 약수리로 나와 여관 냉방에서 밤을 새웠다. 이튿날 아침에 큰길에 나가 지나가는 촌로에게 전봉준 장군이 마지막 밤을 지냈다는 청류암을 찾아가는 길을 물었더니, “그 이야기라면 건넛마을 가인리에 사시는 이형옥 어른을 찾아가 여쭈어보면 자세히 가르쳐 줄 거요”라고 했다.



백양사 청류암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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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송진우가 공부했던 백양사 청류암을 알려준 고 이형욱 선생. 사진 신복룡


나는 서둘러 그 어른댁을 찾아갔다. 1894년생이셨으니 그 무렵에 벌써 87세의 고령이셨다. 찾아뵌 연유를 말씀드렸더니 그는 감격스러운 듯, “누군가 전봉준 장군의 마지막 행적을 물으러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려나, 기다린 지 70년이 되었다오”라고 감회를 말했다. 그분은 어린 시절에 석하(石霞)라는 법명을 받고 청류암의 승려 생활을 했으며, 자신이 독립운동가 이갑성(李甲成)의 사촌동생이라는 말도 했다. 그 어른은 몸소 청류암까지 나를 안내하겠다고 하시면서 부서진 우산대를 지팡이로 삼아 앞장을 서셨다. 그러나 마음 뿐, 300m를 가지 못하고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으니 이리저리로 잘 살펴보라면서, 그곳에는 전봉준 장군의 친필 암각서가 두 곳 있으니 그것도 잘 찾아 사진도 찍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노인을 산중에 남겨두고 칡넝쿨을 헤치며 겨우 청류암을 찾을 수 있었다. 노령산맥 끝자락의 서출동류(西出東流, 서쪽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흘러가는 감천수)의 명당에 자리 잡은 청류암은 참으로 명승지였다. 나는 사진을 찍고 노인을 모시고 돌아오면서 많은 증언을 들었다. 서울에 올라와 전봉준의 암각 글씨 사진을 현상해 보니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탁본을 떠오지 못한 것이 그리 아쉬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탁본에 능숙한 학생 다섯 명을 데리고 한 달 만에 다시 청류암을 찾아갔다.

이형옥옹은 몹시 기뻐했다. 노인은 탁본에 쓸 양동이와 사다리를 빌려주셨다. 내가 일행과 함께 청류암으로 올라가는데 어른이 내 뒤꼭지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잠은 오른쪽 끝 방에서 주무시구려.”

나는 그 방이 좀 더 깨끗하고 따뜻해서 하시는 말씀이려니 생각하고 별 뜻 없이 여기면서 청류암으로 올라갔다. 절벽에 전봉준이 쓴 ‘청류동(淸流洞)’이라는 글씨와 약수터에 쓴 ‘남천감로(南泉甘露)’라는 글씨를 탁본한 다음 이튿날 다시 가인리로 내려와 이형옥 선생께 작별의 인사를 드리러 들어갔다. 글씨를 바라보시는 노인의 모습이 그리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글씨를 다 보신 어른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내가 왜 어제 오른쪽 끝방에서 자라고 말했는지 궁금하지 않수?”

내가 연유를 여쭈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 방이 바로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선생이 망국의 한을 품고 젊은 날에 구국의 방략을 고민하며 공부하시던 방이라우.”

나는 놀라며 여쭈었다.

“전기(傳記)에는 고하가 백양사에서 젊은 날에 공부한 적이 있다고 기록돼 있을 뿐입니다.”

“청류암으로 올라가려니 어쩔 수 없이 백양사에 들렸을 것이고, 청류암이 백양사의 말사였으니 하기 쉬운 말로 백양사에서 공부했다고 말했겠지만, 바로 그 청류암이 청년 시절 그의 마음의 고향이었다우.”

“그렇다면 그때가 어느 무렵이었습니까?”

“을사조약이 체결된 직후였으니까 아마 1906년 초가 아니었던가 생각되우. 내가 시봉(侍奉)을 했다우.”



송진우를 찾아온 장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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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의 극심한 이념 대립 속에서 희생된 중도 정치인 송진우.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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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는 그리 오래 청류암에 머무른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청류암의 동자승으로 12년의 세월이 지난 1921년 무렵에 이형옥 선생은 일본으로 유학해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공부하다가 곧 청류암으로 돌아와 다시 승려 생활을 시작했다. 그 무렵 건장한 청년이 된 송진우가 청류암을 다시 찾아왔는데 몇몇 젊은이들을 데리고 왔다. 그들은 요사채 한 방을 빌려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조국의 미래를 토론했는데 요즘 말로 수련회를 왔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던 어느 해에는 한 헌헌장부가 청류암으로 송진우를 찾아왔더란다. 둘이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얼싸안고 방으로 들어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형옥 선생이 물심부름이랑 이런저런 일로 들락거리며 두 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 보니, “망국” “독립” “청년 학생” “교육” 그리고 “학교가 잘 돼야 할 텐데…” 라는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데, 이런저런 말 끝에 송진우가 그 손님에게 말했다.

“앞으로 장군(張君)이 할 일이 많소.”

하더란다. 나는 귀가 번쩍 띄어,

“그 장군이라는 분은 누구시던가요?”

“그 손님이 하산한 다음에 누구인가 여쭤봤더니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선생입디다.”

이 심산유곡의 청류암에 한국 현대사의 이런 비화도 있었나 싶어 나는 가슴이 먹먹했다. 그 무렵 이미 송진우는 이웃 마을에 살았던 청년들, 이를테면 자신보다 한 살 아래인 김성수(金性洙)와 한 살 위인 백관수(白寬洙), 그리고 세 살 위인 김병로(金炳魯)와도 자별한 사이였으니 그들도 청류암에 왕래가 있었을 것이다. 작별 인사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이형옥 선생께서 논두렁에서 우산대 지팡이에 의지한 채 내 뒤에 대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가 세상에 기록으로 남을 수 있도록 신 박사가 글을 잘 써주시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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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을 당시의 송진우 수감자 카드.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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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을 주도한 한민당의 뿌리



이상의 이야기를 모자이크로 짜맞추어 보면, 송진우는 젊은 날에 나라 잃은 설움을 견디기 어려울 때면 청류암을 찾아와 마음을 추슬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얼마나 불심(佛心)이 깊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이 그의 마음의 의지처였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아울러 장덕수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것이 1934년이니까 그가 송진우를 찾아간 시기도 그 무렵 어느 때일 것으로 생각된다. 학교 걱정을 한 것은 아마도 보성전문학교 운영과 교수직으로 가는 문제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정읍의 동학혁명기념관이 내 글을 읽고 청류암의 전봉준 암각서를 입구에 걸어 놓았다. 그런데 몇 년 뒤에 가보니 그 액자가 없어졌다. 왜 떼었느냐고 물었더니,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2권 174쪽)에 “정치학자가 뭘 안다고 전봉준의 글씨가 아닌 것을 붙여놨다”고 쓰여 있기에 떼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역사도 모르는 정치학자가 그걸 발굴하도록 역사학자들은 뭘 했나?

한국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동아일보, 보성전문학교,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뒷날 해방정국을 주도한 한민당의 뿌리는 그 무렵 청류암 멤버들이 주축이 아니었던가, 나는 생각하고 있다. 역사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의 기록’인데, 혹시 송진우의 생애나 사상을 글로 남기고자 하는 후학들이 있다면 그의 ‘청류암 시절’을 꼭 유념해 역사의 공백기를 채워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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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송진우 선생 탄신 134주년 및 서거 79주기 추모식'.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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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 홀로 선 사람들



송진우의 생애를 논의하자면 그 무렵 이 땅에서 온건파 중도 노선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했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빼어놓을 수 없다. 1945년 12월 26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5년에 걸친 신탁통치를 결의했다는 사실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다음 날인 27일이었다. 그러나 그날, 한국의 정치인들은 그 진의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한 채 하루 동안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우왕좌왕하다가, 28일에 이르러서야 김구(金九)를 필두로 한 임정 세력과 국내파 민족 진영 그리고 좌익의 대표들이 경교장에 모여 반탁 투쟁을 결의했다. 여기에서 좌익도 처음에는 탁치 반대 노선을 분명히 했다(동아일보 1945. 12. 30).

경교장의 모임에는 송진우도 참석했다. 누구도 반탁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는 격앙돼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오직 송진우만이 이렇게 말했다.

“원론적으로 탁치를 반대하지만, 아직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문을 읽어보지도 못한 상황에서 이와 같은 흥분된 방법으로 회의를 이끌어가는 것은 미국과 군정을 적으로 몰 수 있으므로 좀 더 냉정하게 사태를 논의합시다.”

그러나 그의 그런 의견은 분노의 고성이 오가는 분위기에서 아무런 호소력이 없었다. 이튿날이 되자 서울의 정가에서는 송진우가 탁치에 찬성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치적 노선으로 볼 때 온건 중도 노선의 지도자들에게는 설 땅이 없고 오히려 광야에 홀로 선 사람처럼 외롭게 소신을 지탱하던 그는 끝내 탁치 발표 사흘 만인 12월 30일에 사살됐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난마와 같은 해방정국에서 “신탁통치 문제를 가슴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냉정과 이성으로 지혜롭게 고민하자”고 주장하던 송진우나 장덕수나 여운형은 좌우의 십자포화로 말미암아 희생됐다. 그 시대의 정서는 이성이나 우국적 고민보다는 성급하고 충동적이었으며 광기와 무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땅에 중도 온건파가 설 자리가 없었다는 점이 그 뒤의 비극, 곧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졌다. 어느 시대의 역사를 보더라도 온건 중도파가 박해받는 사회의 말로는 비극적이었다. 그를 죽인 자객들의 논리에 따르면 “반탁의 반대는 찬탁”이라는 것이라지만, 그 논리는 맞지 않는다.

그때로부터 8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시간은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가 진보하기에는 80년의 세월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때의 갈등과 모순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기에는 우리의 아픈 경험이 너무 아깝다. 이럴 때일수록 중도파가 남긴 정치적 유산이 우리에게 남겨준 가르침을 반추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관련기사▶ 2편. 누가 장덕수를 암살했나…이승만·김구 그때 갈라섰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2422

■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목차

〈제 1부〉 이승만과 김구의 만남과 헤어짐

① 여인과의 만남은 박복했다…출신 다른 이승만·김구 공통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6303

② 레닌 금괴가 임정 갈랐다…이승만-김구 ‘결별’ 세 장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7987

③ 좌우 대립의 ‘불편한 진실’…右는 우익, 左는 좌익 죽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39731

④ 가슴 따른 자, 머리 못 이긴다…김구와 이승만 ‘정해진 운명’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2924

〈제 2부〉 여운형과 김규식의 만남과 헤어짐

① 임정과 밀정, 그리고 여운형…김구 측근은 권총 빼들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4524

② “대물 여운형” 점찍은 美군정, 병약남 김규식에 눈 돌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6200

③ 미국은 양다리를 못 참았다, 중도파 고집한 여운형 최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7586

④ ‘좌우합작’ 허구의 희생자들…중도파, 비극적 해프닝 맞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8952

〈제 3부〉 송진우와 장덕수, 중도파의 비극적 운명

① 송진우의 ‘찬탁론’ 와전됐다, 기어이 총을 쏜 광기의 시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0770

② 누가 장덕수를 암살했나…이승만·김구 그때 갈라섰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2422



〈제 4부〉남북협상이라는 신기루

① 평양서 김구 맞이한 첫사랑…김일성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4116

② 아버지는 자결, 조부는 친일…北 택한 홍명희 ‘기구한 3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5569

③ 홍명희는 아들과 맞담배했다, 부자간 치열했던 ‘이념 논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215

④ 北이 꾸민 가장 기만적 모임…‘남북협상’ 비극으로 끝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8833

〈제 5부〉박헌영, 한 공산주의자의 사랑과 야망

① 박헌영, 이 가혹한 호적등본…생모는 첩, 직업 주막업 기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0650

② 남편 동지의 아이 가졌다…박헌영 아내의 ‘접촉사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2281

③ 스탈린은 박헌영 의심했다…모스크바 면접장서 생긴 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3860

④ '운명의 여인’ 현앨리스 재회…박헌영 죽음의 빌미 됐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5466



〈제 6부〉해방정국의 3대 비극

①항쟁이냐 공산폭동이냐…1946년 '대구 사건'의 진실(상)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7163

②혁명도 빨갱이 폭동도 아니다, 좌우가 왜곡한 대구사건 진실(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8831

[참고문헌]

김학준, 『고하 송진우 평전』(동아일보사, 1990)

고하선생전기편찬위원회, 『고하 송진우 선생전』(동아일보사, 1965)

동아일보, 1945. 12. 30.

신복룡, 『전봉준 평전』(들녘, 2019)

신복룡, 이형옥(李衡玉, 1921년생)옹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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