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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 (월)

“수감된 美기자 구하라”…러 암살범과 맞교환, 치열한 외교전 ‘막전막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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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 게르시코비치(왼쪽) 등 러시아에서 풀려난 수감자와 미 정부 관계자들이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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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인했던 시련은 끝났고 그들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이날 단행된 러시아와의 수감자 교환에 대해 이 같이 말했다. 바이든 대통령 주변에 서 있던 미국인 수감자들의 가족은 환하게 웃으며 손뼉을 치며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이날 극도의 보안 속에 이뤄진 수감자 교환은 최근 수십 년 사이 가장 큰 규모다. 총 7개국이 이번 프로젝트에 직접적으로 연관됐고 24명의 수감자가 한날 동시에 비행기를 타고 고국으로 향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이날 공개한 그동안 있었던 비공개 일화를 종합하면 이번 프로젝트는 치열했던 미국과 러시아의 신경전을 바탕으로 한다. 여기에 종신형을 받고 독일에 수감되어 있던 러시아인과 수감 중 사망한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등을 둘러싼 각국의 치열했던 움직임 등이 종합적으로 맞물려 움직인 외교전의 종합판이었다.

◇푸틴 총애받는 암살자 원한 러시아

지난해 3월 29일 미 월스트리트저널(WSJ) 소속 주(駐)러시아 특파원으로 취재하던 에반 게르시코비치(Gershkovich·33)가 러시아 방첩 기관인 연방안보국(FSB)에 붙잡혔다. 그는 미국과 구(舊)소련 사이에 이어졌던 냉전이 끝난 후 러시아에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첫 미 언론인이다. 러시아는 그에게 ‘간첩죄’를 적용했지만 사실무근이었다. WSJ의 보도내용을 종합하면 이번 거래의 중심에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21년부터 석방을 추진해 온 러시아 정보기관 FSB(연방보안국)소속 전문 암살자 바딤 크라시코프가 있다. 그는 2019년 독일 베를린의 한 공원에서 체첸 반군 야전사령관 출신 젤림칸 칸고슈빌리를 살해한 혐의로 독일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러시아는 에반과 크라시코프를 교환하려고 했다. 이런 노력은 그 전부터 있었다. 러시아는 2018년 간첩혐의로 체포된 미 해병대원 출신 폴 휠런과 크라시코프를 교환하자고 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크라시코프의 석방은 독일 정부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도 풀어내기 어려운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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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보기관 FSB(연방보안국)소속 전문 암살자 바딤 크라시코프./로이터 연합뉴스


◇美 정부와 에반의 가족, “독일을 움직여라”

독일을 움직이기 위해 미 정부와 에반의 가족들이 전부 동원됐다. 바이든 정부에서는 제이크 설리반 대통령 보좌관 겸 국가안보보좌관이 이 문제를 담당했다. 지난해 말 미국은 독일에 크라시코프를 수감자 교환에 사용하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독일 내부에서는 “살인자인 그를 풀어주면 앞으로 푸틴이 더 많은 일을 저지를 것”이라며 반대 기류가 강했다. WSJ은 지난해 9월 에반의 어머니 엘라를 한 만찬 자리에 초대해 자연스럽게 올라프 슐츠 독일 총리를 만나게 하기도 했다. 이 곳에서 엘라는 “아들을 구해달라”고 애원했고 슐츠는 “우리는 돕고 있다”고 했다고 한다. 지난 1월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엘라는 슐츠 총리의 참모를 만나 “당신이 열쇠를 쥐고 있다”고 또다시 간청했고, 조 바이든 대통령도 슐츠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통화를 했다. WSJ에 따르면 에릭 슈미트 전 구글 CEO가 바이든에게 “독일이 알렉세이 나발니를 껴 넣으면 교환에 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고 이는 적중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올라프 슐츠 독일 총리를 백악관에 초청한 올해 초부터 에반과 나발니 그리고 크라시코프를 명단에 넣은 미국과 독일의 협상이 진행됐다. 보안을 위해 설리반의 사무실에서 종이로만 작성한 초안이 독일에게 전달되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나발니의 죽음

지난 2월 6일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는 전 폭스뉴스 앵커 터커 칼슨과 푸틴의 인터뷰가 진행됐다. 칼슨은 “에반은 분명히 스파이가 아니며 그를 인질로 잡는 것은 러시아를 스스로 낮추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푸틴은 “미국의 동맹국에서 복역 중인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시 한번 크라시코프를 수감자 교환의 대상으로 원한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인터뷰가 나간 당일 슐츠 총리는 워싱턴에 가 바이든 대통령과 한 시간 동안 회의를 한 뒤 수감자 석방에 합의했다고 한다. 그런데 불과 며칠 뒤인 2월 16일 나발니가 수감 도중 사망했다. 낙담하는 에반의 가족들에게 설리반은 “독일이 이미 참여하기로 했기 때문에 길이 보인다”며 위로했다. 다행히 독일도 판을 뒤집지 않고 계속 가져가기로 했다. 6월과 7월 미 정보 당국자들은 중동에서 러시아 측과 만났다. 수감자 교환 대상에는 슬로베니아에 수감된 러시아 스파이 2명도 있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코로나로 델라웨어 자택에 격리된 상황에서 슬로베니아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수감자 교환에 대한 협조를 당부했다.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기 한 시간 전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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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미 워싱턴에서 열린 나토 회담에서 만난 바이든과 올라프 슐츠 독일 총리(왼쪽)./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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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국 엮인 대규모 수감자 교환

이번 프로젝트는 최근 수십 년 간 있었던 수감자 교환 중 가장 큰 규모로 꼽힌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24명의 수감자 중 8명이 러시아로 향했다. 이들은 미국(3명), 슬로베니아(2명), 노르웨이(1명), 독일(1명), 폴란드(1명)에 수감되어 있었다. 러시아에 수감됐던 에반 등 15명과 벨라루스에 있던 수감자 등 총 16명은 각각 미국(3명)과 독일(13명)로 돌아갔다. 깨지기 쉬웠던 이 과정은 마지막까지 긴장 상태였다. 이날 오전 백악관 측은 에반의 어머니 엘라에게 전화를 해 “남편과 딸을 데리고 백악관으로 와라.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전했다. 에반 등은 이날 오전 튀르키예의 수도 앙카라에서 7대의 비행기에 나눠 타고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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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윤주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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