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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 (월)

우리는 여전히 알파벳을 발명하고 있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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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7세기 예수회 박식가 아타나시우스 키르허가 1679년에 낸 책 ‘바벨탑’에 실린 문자 비교 표. 로마 대문자로 표기된 소릿값을 맨 왼쪽에 배치하고 원대 사마리아 문자, 십계명 석판에 쓰인 모세 문자, 고대 시리아 문자, 히브리 문자 등 표제가 붙어 있다. 아르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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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의 발명
문자의 기원을 향한 탐구의 역사
조해나 드러커 지음, 최성민·최슬기 옮김 l 아르테 l 4만8000원



알파벳에 관한 오해 한 가지. 알파벳이라면 A(에이)에서 Z(제트)까지 자모 26개로 이루어진 영문자를 떠올리고는 하는데, 정확한 이해는 아니다. 영어 표기에 쓰이는 이 문자 체계는 로마자로 불리며, 그리스 문자가 이탈리아로 건너와 변형된 라틴 문자에 글자 몇 개가 추가된 것이다. 로마자와 라틴 문자, 그리스 문자는 물론 아랍 문자와 인도 문자, 동남아 문자까지 음소 단위의 음을 표기하는 문자 체계를 모두 가리키는 말이 알파벳이다.



다음은 이 책 ‘알파벳의 발명’에 관한 오해. 시각예술 이론가이자 역사가인 조해나 드러커(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 문헌정보학 교수)가 쓴 이 책은 알파벳의 탄생과 발전의 역사가 아니라 그에 관한 탐구의 역사를 담은 책이다. 기원전 2000년께 지금의 시리아와 레바논에 해당하는 레반트 지역 연안 도시들에서 형성된 알파벳이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간 과정, 최초의 알파벳의 출현과 전파 경로를 확인하기 위한 학자들의 노력, 고고학과 고문자학 등 관련 분야의 성과들, 알파벳을 둘러싼 문화적 편견 등이 두루 다루어진다.



“기원전 7500년경 초기 수메르문명에서 첫 원시 문자와 표장을 이용한 회계 제도가 개발되고 기원전 3000년경 그림문자와 설형문자가 나타난 이래 고대 중동에는 문자 개념이 있었다.”



수메르에서 시작된 설형문자와 이집트의 신성문자는 서로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이 문자들이 알파벳 문자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질문이다. 그러나 “기원전 2000년대에 완전히 통일되고 일관된 ‘알파벳’이 등장했다는 기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알파벳 계열 문자는 이 최초의 알파벳에서 갈라져 나와 변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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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프 도레의 ‘성서’ 중 석판을 부수려 하는 모세를 그린 출애굽기 삽화. 일부 유대계 역사가들은 모세가 전달한 십계명에 적힌 문자가 히브리어 자모의 출발이라고 주장한다. 아르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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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 책 ‘역사’ 제5권에서 알파벳이 그리스인의 발명품이 아니라 카드모스와 페니키아인에게 받은 선물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고대 그리스인들이 알파벳을 만들어냈다는 ‘그리스 기원설’은 꾸준히 반복 주장되며 서구 우월주의를 부추긴다. 한편 구약성서 출애굽기에는 모세가 야훼로부터 받은 십계명을 석판에 기록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을 근거로 알파벳을 ‘신의 선물’이라 여긴 이들은 시나이산을 비롯한 성서 유적지에서 최초 알파벳의 흔적을 찾고자 했다. 구약성서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한 탐험이 근대 고고학의 출발을 알렸고 그 결과 알파벳에 관한 역사적·과학적 사실들이 확인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알파벳의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우선 동원된 자료는 고대의 다양한 알파벳 형태를 담은 필사본과 인쇄본들이다. 아랍어 필사본 저자 이븐 와흐시야가 서기 863년에 쓴 ‘고대 알파벳과 신성문자 해설’이라는 문헌은 약 80개에 이르는 다양한 문자를 그 정체 및 유래에 관한 설명과 함께 소개해 놓았는데, 그 가운데에는 다른 자료에는 등장하지 않는 순전한 창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최초의 주요 인쇄본 알파벳 총람인 요하네스 트리테미우스의 ‘다중 표기학’(1518)을 비롯해 클로드 뒤레의 ‘세계 언어사의 보배’(1613)와 에드먼드 프라이의 ‘만유문자’(1799) 같은 총람은 “알파벳에 관한 지식을 통일하는 동시에 여러 언어와 역사적 시대, 지역과 연관된 문자를 수집해 그런 지식을 다양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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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년에 출간된 연금술사 요하네스 판테우스의 ‘보아르카두미아’에 인쇄돼 실린 에녹 문자. 에녹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증조부로, 에녹서는 가톨릭과 개신교에서는 구약 외경으로 분류된다. 아르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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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알파벳 형태들을 단순히 모아 놓는 데에서 더 나아가 문자들끼리 비교함으로써 알파벳의 기원과 발전을 연구하려는 시도도 이어졌다.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오컬트 철학’(1531)에 처음으로 초보적인 문자 표가 실린 것을 필두로 안젤로 로카의 대판 인쇄물 ‘여러 언어의 알파벳과 발명자들’(1595), 아타나시우스 키르허의 ‘바벨탑’(1679), 앙투안 쿠르 드 제블린의 ‘원시세계’(1777), 마르크 리즈바르스키의 ‘북셈 금석학 편람’(1898), 벤저민 새스의 ‘알파벳의 탄생과 발전’(1988) 등에서 격자 모양 표는 여러 형태의 알파벳들 사이의 연관성을 독자에게 효과적으로 납득시키는 기능을 한다.



총람 편찬자들과 표 제작자들이 수집하고 보존한 정보는 실물로써 확인되어야 했다. 초기 알파벳의 기원과 발전을 알려 주는 고유물(antiquities)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고, 그에 따라 고고학과 고문서학이 발달했다. 시나이반도의 무수한 바위에 새겨진 명문(銘文), 레바논 중남부 항구도시 시돈에서 출토된 기원전 15세기 에슈무나자르 왕의 석관, 요르단 디반의 기원전 9세기 중반 선형 페니키아 문자 석비, 레바논의 고대 항구도시 비블로스에서 발견된 아히람 석관 등의 유물들은 “하나 이상의 알파벳 문자가 기원전 2000년대 초 내지 중엽에 널리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 알파벳이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다양한 기원과 형태를 지닌 채 시간을 두고 발달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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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명한 캘리그래퍼 조반니 바티스타 팔라티노가 1540년에 출간한 표본집 ‘습자 신서’ 1568년 판에 실린 암호 문자(왼쪽)와 에스라 전대 히브리 문자(오른쪽). 아르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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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이집트 사막에 있는 와디 엘홀 계곡 바위들에서는 측정 연대가 기원전 2050년에서 1350년에 이르는 명문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가운데 초기 알파벳 명문 두 점은 “가장 오래된 알파벳 문자”로 여겨지며 학계에 대지진을 일으켰다. 와디 엘홀 명문의 연대 측정과 내용 해독에 관해서는 여전히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이 명문은 “알파벳 문자가 지리적으로 이집트에서 시작했을 개연성”에 큰 힘을 실어 주고 있다. 2022년에 원서가 나온 이 책은 최근의 발견과 연구 성과까지 포함시켜 알파벳 기원 연구의 생생한 현장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책 말미에는 ‘알파벳 효과’로 대표되는 알파벳의 정치적 왜곡, 컴퓨터와 인터넷에 작동하는 문자 헤게모니와 문화제국주의 문제 등에 관한 우려도 곁들여진다. 기원전 2000년 무렵 형성되어 다양한 경로로 변형·발전해 온 알파벳은 여전히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다. “(디지털)표준과 캐릭터 코드의 복잡성, 역사적 증거 개념의 변화, 인간 지식 패러다임의 전환 등을 고려할 때, 우리는 여전히 알파벳을 발명하고 있다”는 책의 마지막 대목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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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벳의 발명’의 지은이 조해나 드러커. 아르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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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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