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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9 (금)

초봉 5억 주는 美 빅테크로... AI 고급 인재 40%가 한국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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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반도체 인재 대란] [上]

조선일보

그래픽=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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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을 개발, 서비스하는 한 국내 대기업은 올 초부터 지난달까지 AI 개발자 채용 공고를 다섯 번 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AI 인력 채용을 한 셈이다. 공개 채용으로 10명을 뽑으면 서너 명은 아예 출근을 안 했다. 채용 공고를 다시 내서 뽑아도 또 결원이 생겼다. 근무 기간을 한 달도 못 채우고 나가는 경우도 이어졌다. 이 회사 인사 담당 임원은 “처음엔 교수직이나 다른 대기업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중 일부는 미국의 구글이나 애플 같은 빅테크로 떠났다”며 “애초 ‘게임’이 안 되는 채용 경쟁을 한 셈”이라고 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AI와 AI 반도체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AI·반도체 인재 확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 현지 빅테크에선 명문대 석박사 졸업생의 초봉이 40만달러(약 5억5000만원)부터 시작한다. 미국 대학의 AI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김모(29)씨는 “같은 전공을 하는 한국 유학생 중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명문대가 아니어도 해외 대학의 AI 석사 출신이 국내 기업에 요구하는 기본 연봉은 약 1억5000만원. 한 대기업의 한 CTO(최고기술책임자)는 “국내 기업이 맞춰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며 “이런 상황이니 누가 국내에 남으려 하겠느냐”고 말했다.

국내 인재의 해외 유출은 심각하다. AI 인재의 이동을 추적하는 미국 시카코대 폴슨연구소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한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AI 인재의 40%가 해외로 떠나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서도 인재 경쟁은 만만치 않다. 미국, 일본, 유럽 등에서 생산 기지를 늘리고 AI 열풍 때문에 AI 반도체 개발 경쟁도 덩달아 심화되자 원래도 충분치 않았던 반도체 인력이 더 모자라게 됐다. 본지가 반도체나 AI를 주력 제품이나 서비스로 삼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LG·KT 등 대기업 10곳의 기술·인사 임원을 설문한 결과, 이공계 석박사 이상 ‘고급 인력’을 채용하는 게 “어렵다” 혹은 “매우 어렵다”고 한 응답자는 10명 중 9명이었다.

조선일보

그래픽=박상훈


국내 한 반도체 기업은 최근 해외 유명 대학 출신의 엔지니어를 뽑았다가 출근 직전 “입사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국내외 여러 회사에 입사 원서를 냈고 뒤늦게 미국 빅테크에 채용됐다는 것이다. 이 회사 인사 담당 임원은 “우리 회사에 꼭 데려오려고 빅테크 연봉과 처우를 물어봤는데 도저히 맞춰주기 힘든 조건이었다”며 “요새 국내외 대학을 막론하고 이공계 석박사 졸업자들, 특히 AI와 반도체 관련 전공자들은 한국 기업과 함께 빅테크나 해외 IT 회사에 원서를 다 돌리는 게 기본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난다”고 했다.

본지 설문에 참여한 대기업 임원 10명 중 전원이 원하는 인재의 최종 학력 수준으로 이공계 석사나 박사 학위 소지자를 꼽았다. AI나 반도체 분야에서 일정 수준의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갖고 있는 ‘고급 인력’이 필요하단 얘기다. 하지만 이 분야의 인재 경쟁이 세계 대란 수준으로 번지면서 국내 대기업들은 자원이 풍부한 빅테크와 맞붙는 상황에 몰렸다. 게다가 국내에서는 의대에 우수한 두뇌를 뺏기면서 ‘고급 인력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빅테크 향하는 고급 인력

국내 대기업을 다니다가 미국에서 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실리콘밸리의 기술 기업에 취업한 유모씨는 “빅테크들은 급여도 높고, 능력에 따라 승진하는 문화가 있어서 국내 기업보다 커리어에 유리하다고 느꼈다”며 “한국에서는 작은 시장, 고용 형태 등 시스템 차이로 노력 대비 미국과 같은 수준의 보상을 맞춰 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이공계 유학생들을 두고 경쟁하던 국내 기업들은 빅테크를 새로운 경쟁자로 맞았다. 최근 국내 명문대의 이공계 석박사 출신까지 빅테크로 취업하는 경우가 늘면서 경쟁의 정도와 환경도 달라졌다. 본지 설문에 응한 한 기업 임원은 “코로나 전까지만 해도 국내 석박사 출신들은 대부분 국내 기업에 취업한다는 전제가 있었는데 미국에서만 AI와 반도체 인력을 조달하는 데 한계를 느낀 빅테크들이 해외 인력에 눈을 돌렸다”며 “문제는 빅테크에는 연봉 상한선이 없다시피 하고, 노동 시장도 유연하기 때문에 국내 기업이 이들과의 채용 경쟁에서 번번이 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카이스트의 한 반도체 연구실에서는 최근 연구생 열 명 중 여섯 명이 해외 취업을 하고 있다. 이 연구실을 이끌고 있는 교수는 “지난달에도 애플에 인턴을 하러 간 석사 학생이 취업 제안을 받았다”며 “요즘 이공계 학생들은 영어로 소통하는 데 어려움이 없고, 미국의 취업 비자 발급도 예전보다 수월해져서 빅테크 취업 장벽이 거의 사라졌다”고 했다. 실제로 미국 국무부가 과학·예술·체육 특기자에게 발급하는 O-1비자 중 한국 국적자는 10년 새 두 배가 늘었다. 미국에 취업하는 예술과 체육 특기자가 대폭 늘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비자를 받은 한국 국적자 대부분은 이공계 분야 고급 인력으로 풀이된다.

조선일보

그래픽=박상훈


◇의대 쏠림에 AI, 반도체 외면

본지 설문 조사 응답자들은 고급 인력 채용이 어려운 이유로 ‘이공계 학생의 풀(pool)이 적다’는 대답을 가장 많이 꼽았다. 이 문제를 지적한 한 임원은 심층 인터뷰에서 “학생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다는 게 아니라 예전보다 우수한 인재가 이공계로 진학을 하지 않아 석박사까지 연구를 하는 학생들이 줄었다”고 설명했다. 응답자 10명 모두 “의대 쏠림이 인력 부족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 혹은 ‘그렇다’라고 응답했다. 반도체 기업의 한 임원은 “국내 반도체 산업이 한창 발전하던 80~90년대엔 이공계 상위권 학생들이 전기, 전자, 물리, 화학 등 공대와 기초 과학 분야로 진출한 반면, IMF 이후엔 이들이 의대에 가면서 이공계 인력 자원 자체가 줄었다”고 했다.

[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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