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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古典은 지루하다고? 신나게 춤추고 웃음 빵빵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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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입센·셰익스피어… 고전 재해석한 공연 잇달아

조선일보

/쇼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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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안은 이미 1812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오페라 극장. 레드카펫이 깔린 듯 붉고 거대한 원반형 무대들이 겹치고 엇갈리게 설치돼 있고, 양쪽 벽에 돌출된 고풍스러운 발코니석까지 모두 이 뮤지컬 무대의 일부다. 배우들은 손 내밀면 닿을 듯 가까이에서 관객과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네더니, 이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시작한다. 하늘엔 거대한 혜성이 나폴레옹의 임박한 러시아 침공을 예언하는 흉조(凶兆)처럼 긴 꼬리를 끌며 날지만, 젊은이들은 이 절망의 시대 속에서도 내일이 없는 것처럼 뜨겁게 사랑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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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양인성


◇친절하게 재해석한 古典의 귀환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극작·가사·음악 데이브 멀로이)은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1828~1910)의 1869년 작 ‘전쟁과 평화’가 원작. 원작의 등장인물은 총 559명에 달하지만, 뮤지컬은 주인공 ‘나타샤’와 ‘피에르’가 곡절 끝에 삶의 전환점을 맞는 제2권 5장에서 엑기스를 뽑아냈다. 마치 EDM(전자 댄스음악) 클럽인 듯 숨 가쁘게 몰아치는 춤과 노래 속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공연 시간 160분은 눈 깜짝할 새 지나간다.

서가 속에 박제됐던 ‘클래식’을 다시 꺼내 재해석한 공연에 관객들이 열광하고 있다. 지루함과 고리타분함은 싹 걷어내고 이름난 창작자들의 손길로 재해석했다. 이야기는 친절하고, 압도적 무대로 눈과 귀를 사로잡는 것도 공통점이다<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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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크 입센의 원작을 고선웅 서울시극단장이 각색·연출한 연극 '욘'.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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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을 쓴 헨리크 입센(1828~1906)의 말년 걸작 ‘욘’은 ‘조씨고아’의 극작·연출가 고선웅 서울시극단장이 장기인 말맛과 리듬감, 블랙 유머를 살려 속도감 있게 재구성했다. 셰익스피어의 1608년 작 ‘리어왕’을 우리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 배삼식이 노자 사상으로 재해석해 새롭게 쓴 창극 ‘리어’도 최근 열흘간 공연을 전회 전석 매진시켰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성은 우리 소리의 힘으로 극대화됐고, 이태섭 미술감독이 20톤의 물을 채워 넣은 검은 무대는 그 자체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관련기사] 창극이 된 막장 비극 ‘리어왕’

◇관객도 공연에 직접 참여

‘그레이트 코멧’은 관객도 공연의 일부로 적극 참여하는 이머시브(Immersive·관객 몰입) 뮤지컬. 객석을 향해 고정된 사각형 무대 대신, 바로 곁에서 배우들이 춤추고 노래할 때 관객은 극의 일부로 녹아든다. 극 중 인물에게 청혼받거나, 인물들 사이 편지를 전해주는 등 관객은 작품의 일부로도 참여한다. 이 뮤지컬은 말하자면 배우부터 관객까지 전원 수비와 전원 공격에 가담하는 현대 축구 이론의 ‘토털 사커(total soccer)’를 연상시킨다.



도입부 노래 ‘프롤로그’는 복잡하기로 악명 높은 원작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관객이 따라 부르며 예습하도록 친절하게 돕는다. ‘등장인물 이름 정돈 외워둬/ 이따 졸지 않으려면 (…)/ 나타샤는 어려/ 안드레이만 사랑해 /소냐는 착해 /마리야는 엄해 /아나톨은 핫해 /엘렌은 헤퍼 /돈은 많은데 안 행복한 /우리의 피에르'로 이어지는 노래. 주인공 피에르(하도권·케이윌·김주택)가 마지막 노래를 부를 때 붉은 원반 무대 주위로 LED 조명이 혜성처럼 비행하는 듯한 연출은 숨 막히게 아름답다. 뮤지컬은 결국 극 중 노래처럼 ‘대단한 삶도 하찮은 삶도 없으며 우린 모두 각자의 전쟁을 치르고 있을 뿐’이라고, ‘혜성이 나타났으니 세상은 끝났다’는 비관에 무릎 꿇지 말고 그저 힘차게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라고 말한다. 5만~16만원, 6월 16일까지.

◇고전에서 건져 올린 경쾌한 웃음

입센의 ‘욘’은 무겁고 장중한 분위기, 대사 사이 호흡까지 지정하는 엄격한 지시문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 하지만 고선웅 각색·연출의 ‘욘’을 보는 관객들은 자주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 긴장과 이완의 리듬감에 ‘쥐면 펴야 하고 이화(異化)가 있어야 동화(同化)도 있다’는 고선웅 연출의 지론이 스며 있다.

나라를 뒤흔든 사업 실패 뒤 명예회복의 망상에 젖어 사는 아버지 욘(이남희), 아들을 통해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으려는 어머니 귀닐(이주영), 갖지 못했던 남자 욘 대신 그 아들에게 집착하는 이모 엘라(정아미)는 각자가 믿는 미래를 아들 엘하르트(이승우)에게 강요한다. 이 모든 걸 뿌리치고 연상의 이혼녀와 함께 제멋대로 길을 떠나며 아들은 말한다. “난 미래를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어디든 제가 가보고 싶은 곳으로 잘 가보려고요. 절대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그건 제일 멍청한 짓이니까요.” 미래는 젊은 사람들의 몫, 애초에 기성세대에겐 그걸 저당 잡을 권리 따위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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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크 입센의 원작을 고선웅 서울시극단장이 각색·연출한 연극 '욘'에서 주인공 욘을 연기한 이남희 배우.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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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집 안에 스스로를 가뒀던 남자 욘이 집 밖으로 나설 때 무대가 흰 설산으로 뒤바뀌는 마지막 장면 전환은 압도적. 설산 위 마지막 욘의 독백은 상처 입은 늙은 늑대의 포효처럼 가슴을 울린다. 4만~6만원, 공연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21일까지.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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