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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지주·부농·반혁명세력·파괴분자·우파는 다섯 부류 검은 무리(黑五類)”[송재윤의 슬픈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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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문화혁명 이야기 <12회> ◇ 혁명 투사 다수도 반혁명·수정주의·우경분자로 몰려

정치투쟁은 인간의 숙명인가. 열혈 공산당원들끼리 모이면 다시 그들은 좌우로 나뉘어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인다. 1960년대 중공중앙의 핵심인물들은 모두가 빛나는 혁명의 이력을 자랑하는 “붉디붉은” 투사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 중 다수는 문혁 당시 “반혁명” “수정주의” “우경분자”로 몰려 숙청되고 말았다.

1927년 12월 11일 취추바이(瞿秋白, 1899-1935)는 2만 병력을 투입해 광둥성 광저우(廣州)를 점령하지만 불과 이틀 후 국민당군에 궤멸당하는 참패를 초래한다. 리리산(李立三, 1899-1967) 역시 1930년 7월 후난성 창사(長沙)를 점령하나 며칠 후 국민당군의 반격으로 패주하고 만다. 이어서 왕밍(王明, 1904-1974)을 위시한 모스크바 유학파 “28명의 볼셰비키”가 당권을 장악하는데, 그들의 무모한 군사전략은 당의 존립을 위태롭게 했다.

1930년대 마오쩌둥은 취추바이의 맹동(盲動, 맹목적 행동)주의, 리리산의 모험주의, 왕밍의 교조주의 등을 대표적 “좌의 착오”라 비판했다. 예컨대 1937년 7월 발표한 “실천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좌’익 공담(空談)주의에 반대한다. 그들의 사상은 객관적 과정의 일정한 발전단계를 넘어 환상을 진리로 간주하고, 또 먼 미래에나 실현가능한 이상을 억지로 당장 지금 적용하려 든다. 대다수 사람들의 당면한 실천에서 유리되고, 당면한 현실을 벗어난다. 이들의 사상은 행동 상 모험주의로 표출된다.”

조선일보

<1935년 1월 구이저우 쭌이(尊義)회의. 대장정에 오른 마오쩌둥은 왕밍 등 소련파의 좌익 모험주의를 비판하면서 당권과 군사지휘권을 장악하게 된다.>


1930년대 마오쩌둥은 현실을 벗어난 일체의 공상, 맹동과 모험을 따옴표를 붙여서 “좌”라 불렀다. 20년 쯤 지나 1955년 그는 또 다음과 같이 “좌”를 비판한다.

“좌”란 무엇인가? 시대를 초월하고 당면한 눈앞의 상황을 무시한 채 정책과 방침에서, 또 행동에서 모험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투쟁의 문제에서, 쟁론을 일으키는 문제에서도 어지럽게 싸우는 것, 그것이 바로 “좌”다. 좋지 않다.

그렇게 입으로는 극좌의 위험에 경종을 울렸지만, 만년의 마오에게 절제된 균형 감각이나 중용의 미덕 따위는 기대할 수는 없었다. 특히 1957년 이후 마오쩌둥의 정치적 행보는 좌경화의 극단이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마오는 더욱더 왼쪽 끝으로만 달려갔다. 성마른 혁명분자의 강박증을 흔히 좌익 소아병(krankenheit)이라 부른다. 젊은 시절 그는 좌익 소아병을 앓는 극좌의 맹동과 모험을 비판했다. 그는 늙어서야 좌익 소아병을 앓았던 듯하다. 그 병증의 표출이 바로 문혁이었다.

◇ 극좌 저격수들, 사상 자유 옹호하는 지식인 ‘반혁명’으로 몰아

1965년 12월 중국의 지식인들은 좌·우 사상전에 돌입했다. 역사학자 우한(吳晗, 1909-1969)을 옹호하는 지식인들은 학술토론의 독립성과 사상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언론 지면을 장악한 극좌의 저격수들은 그들을 단숨에 “반혁명분자”로 몰아갔다.

우한은 1960년대 역사극 ‘해서파관’의 극본을 직접 썼다. 그 경극이 성공하자 그는 더 큰 명성을 얻었고, 1965년 당시 그는 베이징시의 부시장직을 역임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해서파관’은 문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해서파관’의 내용을 되짚어 보면, 분명 마오쩌둥에 대한 풍자로 읽힐 수 있다. 명나라 가정제(嘉靖帝, 1507-1567)는 직언하는 충신 해서를 파면했다. 마찬가지로 마오쩌둥은 1959년 여름 여산회의에서 대기근의 참상에 관해 직언하는 국방장관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를 파면했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은 해서를 칭송하고, 해서를 닮으라며 우한에게 ‘해서파관’의 대본을 쓰게 했다.

직언을 꺼리는 간부들을 경계하고 질타하는 순수한 의도였을 수도 있다. 극중의 가정제는 간신들의 요설에 속은 잘못 밖에 없다. 마오 역시 간부들의 허위보고에 속았다면, 대약진의 오류는 거짓을 유포한 자들에게 귀속된다. 마오는 면죄부를 얻을 수도 있다. 설혹 그렇다 해도 충신 해서는 펑더화이의 화신이었다. 해서를 파면한 후 사약을 내린 가정제는 바로 마오가 된다. 펑더화이는 충신이며, 마오쩌둥은 기껏 혼군(昏君)이란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과연 그가 그 함의를 몰랐을까?

주치의 리즈수이의 회고에 의하면, 그 역시 마오의 계략일 수도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미리 함정을 팠다. 이후 해서를 칭송했던 자들은 문혁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뱀을 동굴 밖으로 끌어내는 “인사출동(引蛇出洞)”의 전술이다. 거듭되는 마오의 양모(陽謨)였다는 얘기다.

조선일보

<문혁 당시 베이징의 전통의 베이징 역사극은 폐기되고 혁명성을 고취하는 혁명적 현대극으로 바뀐다. 경극의 혁명화 및 현대화는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주도했다. 1964년 상연된 “홍색낭자군”은 중국식 발레로 8대 양판희(樣板戱, 모범적인 연극)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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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 비판한 우한, 자유주의 사상가 후스의 제자라는 이유로 반동 몰려

극좌의 저격수들은 실로 많은 무기들을 갖고 있었다. 문혁 당시 지(地)·부(富)·반(反)·괴(壞)·우(右) 흑오류(黑五類)가 인민의 공적이 되었다. 지주, 부농, 반혁명세력, 파괴분자 및 우파, 이렇게 다섯 부류의 검은 무리를 의미한다. 덧붙여 국민당반동파와 주자파(走資派,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세력) 당권파(當權派)가 문혁 당시 집중적인 타도 대상이 되었다.

역사학자 우한은 저장(浙江)성 이우(義烏)의 빈농 출신이었다. 1940년대 후반 그는 중국민주동맹(이하 민맹[民盟])에 참여했다. 민맹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아래서 1949년 9월 말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에 참여한 제2의 민주당파였다. 출신성분과 정치이력에서 그는 결격 사유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극좌의 저격수들은 우한을 그의 인격을 살해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1965년 12월부터 극좌의 저격수들은 후스(胡適, 1891-1962)와 우한의 사승관계를 부각시키는 전술을 쓴다.

조선일보

<1958년 타이베이. 후스와 장제스/ https://zh.wikipedia.org/wiki


후스는 백화운동을 주도한 5.4운동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의 지도를 받은 철학자였다. 1928년 우한은 상하이의 중국공학(中國公學)에 입학하는데, 당시 그 대학의 총장이 바로 후스였다. 곧이어 후스는 베이징 대학의 교수로 부임하고, 우한은 후스의 추천을 받아 칭화(淸華)대학에 입학해 명대사를 연구한다. 이후 우한은 칭화대학의 교수가 되고, 학장을 역임한다.

국공내전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 우한은 스승 후스에게 공산주의로의 전향을 설득하지만, 후스는 국민당 정부를 따라 타이완으로 간다. 우한은 그렇게 후스와 사상적으로 확연히 다른 길을 갔다. 그럼에도 저격수들은 우한을 후스의 추종자로 몰아세운다. 1965년 12월 8일 발표된 치번위(戚本禹, 1931-2016)의 “혁명을 위한 역사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는 1920-30년대 후스가 제창했던 “초(超)계급”의 순수객관의 실증사관이야 말로 자산계급의 관점이라 비판한다. 1966년 봄 우한과 후스를 엮는 정치적 비방이 점점 더 고조됐다. 급기야 1966년 6월 1930-1932년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간문을 근거로 후스와 우한의 이념적 연대를 주장하는 비평문까지 등장한다.

후스는 공산주의 대신 자본주의를, 마오쩌둥 대신 장제스를 선택한 대표적인 자유주의 사상가였다. 후스와 우한의 사상적 유대관계를 증명하는 순간, 우한은 국민당반동파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다. 저격수의 총탄이 그의 심장에 명중한 셈이었다. 이미 우한은 소생불가능의 상태에 내몰렸다. 3년 더 연장된 그의 목숨은 잔혹한 형틀에 묶인 삶일 뿐이었다. 스스로 공산주의자를 자처한 우한으로선 억울한 일이었다. 문혁의 광기 속에서 좌를 우로 몬 극좌의 비극이다.

조선일보

<1935년 우한, 부인 위안전(袁震, 1907-1969), 딸 우샤오옌의 모습. 위안전은 1969년 3월 18일 강제노역에서 풀려난 직후 사망한다. 60일 후 우한은 감옥에서 가혹행위를 당하다 병사한다. 딸은 강간당하고 투옥된 후 1976년 9월 23일 자살한다. 4인방이 체포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필자 송재윤(51)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미국 하버드대에서 중국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중국의 건국 전후부터 1960년대까지 근대사를 서술한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까치)를 최근 출간했다. 중국 근현대사 저작을 3부작으로 구상 중이며 이번에 연재하는 ‘문화혁명 이야기’는 2권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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