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6.26 (수)

[오래 전 ‘이날’]10월8일 기대 반 우려 반, 초유의 ‘사법실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959년부터 2009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경향신문

1995년 서울 종묘공원에서 열린 5.18 특별검사제 도입을 요구하는 제9차 범국민대회에 참가한 시민과 학생들이 행진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999년 10월8일 기대 반 우려 반, 초유의 ‘사법실험’

검찰개혁을 향한 국민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수사지휘권, 영장청구권, 기소권 등을 독점하며 ‘무소불위’라 일컬어지는 검찰 권력을,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맞게 분배하고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는 조직으로 재편하는 것이 검찰개혁의 핵심입니다.

이를 위해 공수처(공위공직자비리수사처)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법무부 파견 검사 제한 등이 거론됩니다.

검찰의 ‘기소독점주의 성역’을 깬 제도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바로 ‘특별검사제도’입니다.

검찰이 아닌 제3자에게 수사와 기소 등의 역할을 맡기는 ‘특별검사제’는 검찰만이 기소권을 가지는 기소독점주의의 예외로 주목받았습니다.

한국에 특별검사제가 처음 도입된 것은 20년 전 김대중 대통령 시절이었습니다.

1999년 10월7일 김대중 대통령이 ‘고급 옷로비 의혹사건’과 ‘조폐공사 파업유도 의혹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에 강원일 변호사와 최병모 변호사를 임명하며 첫 특검이 시동을 걸게 됩니다.

당시 경향신문에는 ‘기대 반 우려 반, 초유의 ’사법실험‘이라는 제목으로 관련 기사가 실렸습니다. 살펴보시죠.

경향신문

1999년10월8일자 경향신문 3면.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과거 정치적 의혹이 짙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유일한 대안으로 거론돼 온 특검제가 한국적 풍토 아래서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초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당시 검찰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특별검사 수사가 시작되면 불가피하게 방어적 자세에 설수밖에 없는 검찰은 일단 ‘특별검사 수사에 최대한 협조를 아끼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공연히 자기식구 감싸기 인상을 보일 경우 또다시 정치적 구설수에 휘말일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과잉수사’라는 비난이 나올 정도로 강도높게 진행된 검찰 자체수사에 대한 강한 자신감도 깔려 있었습니다.

검찰 일각에서는 “특별검사가 지나치게 업적주의에 사로잡혀 검찰수사에 대한 흠집내기로 갈 경우 새로운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며 불안감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변호사협회와 시민단체들은 수사권한을 지나치게 제약하는 요소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특별검사가 밝혀야 할 의무는 많은데 권한이 너무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여연대는 “관계기관에서 자료협조 요청을 거부할 경우 특별한 제재수단이 없고, 검찰이 20여명을 투입한 파업유도사건을 특별검사는 3명만으로 60일 안에 하도록 돼 있어 제대로 숨겨진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우려를 표시했습니다.

변호사협회는 처음으로 도입되는 특검제가 별다른 성과없이 끝날 경우 ‘특검제 무용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 특검제 도입에 부담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특검이 헤쳐나가야 할 난관도 예상됐습니다.

특검수사에는 각종 수사기록 제출 등 검찰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검찰은 “필요한 자료는 얼마든지 제출할 수 있지만 국가기밀에 관한 사항은 좀더 검토가 필요하다”며 애매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수사관 및 검사 파견문제에 대해서도 “특별검사가 요구하는 인원은 법이 정한 테두리 내에서 지원하겠지만 누구누구를 보내달라고 특정해 요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옷로비 특검’은 당시 검찰총장의 부인 연정희씨가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던 신동아그룹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로부터 옷을 받고 수사 기밀을 알려줬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하지만 열흘 뒤 검찰이 ‘이씨의 자작극으로 시작된 실체 없는 로비’라고 발표하며 특검 결론은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1999년 첫 특검제 도입 이후 이용호 게이트 특검(2001년), 대북송금 특검(2003년) 노무현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 사건(2004년) 러시아 유전 개발사업 특검(2005년) 삼성비자금 특검(2008년) BBK 특검(2008년) 스폰서 검사 특검(2010년) 디도스 특검(2012년) 내곡동 사저 특검(2012년)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특검(2016년) 드루킹 댓글조작 특검(2018년) 등 현재까지 총 13차례 특검이 있었습니다.

13차례의 특검이 이어지는 동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한 박영수 특별검사팀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2010년 스폰서 검사 특검에서는 전·현직 검사 4명을 구속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법원에서는 무죄 판결로 끝이 났습니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