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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6 (화)

“여보, 수술 잘 받아” 문자가 아내의 유언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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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배터리 공장 화재] 희생자들의 애타는 사연

조선일보

25일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한 장례식장 현황판에 전날 리튬전지 공장 화재로 숨진 사망자 명단이 적혀 있다. 시신이 훼손돼 신원 확인이 안 된 사망자는 번호로 표기돼 있었다. /고운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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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 오후 11시 15분쯤 경기 화성 화성중앙종합병원 장례식장에 달려온 이모(51)씨의 머리엔 흰색 붕대가 감겨 있었다. 면도도 하지 못해 얼굴엔 수염이 듬성듬성했고 반팔에 슬리퍼 차림이었다. 이날 경기 화성 리튬 일차전지 공장 화재로 사망한 라오스인 쑥싸완 말라팁(33)의 남편이었다. 이씨는 뇌혈관 수술을 받고 퇴원 수속을 밟던 중 지인에게서 아내의 사망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 취재진을 만난 이씨는 “‘여보, 수술 잘 받고 보자’는 문자가 아내의 유언이 돼버렸다”며 “뇌수술 받고 퇴원해서 만나려고 했는데…. 아내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씨는 아내와 2010년 결혼, 열한 살짜리 딸을 뒀다. 이씨는 충북 괴산에서 숙박 업소를 운영하고 아내는 화성의 일차전지 공장에서 일한 지 4년쯤 됐다. ‘주말부부’라서 오히려 애틋했다고 했다. 이씨는 아내를 ‘쭈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아내는 일하느라 바쁘니까 시간 여유가 있는 내가 딸을 곁에 두고 키웠다”며 “열한 살짜리 딸이 엄마의 죽음을 듣고 충격을 받을까 얘기도 못 꺼냈다”고 했다. 이씨는 아내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 듯 한숨을 쉬며 허공을 바라봤다.

25일 오후 1시 30분쯤 불에 타 폐허가 된 공장 건물에 중국 동포 채성범(73)씨가 달려왔다. 채씨는 중국 대사관에서 30대 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딸은 오는 가을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였다. 시신이 분산 수용된 화성의 장례식장과 경찰서 등을 예비사위와 함께 돌아다녔지만 딸을 찾지 못했다. 시신이 유전자 감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채씨는 딸이 늘 차고 다니던 목걸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딸 맞는지, 목걸이가 있는 시신이 있는지만 좀 확인해달라”고 경찰에 애원했지만 시신은 이미 부검을 위해 서울로 이송된 뒤였다.

“목걸이만 봐도 우리 딸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데….” 고개를 떨군 채씨는 딸이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딸은 공장에서 1년간 임시직으로 일하다 지난 5월 정직원으로 채용됐다. 화·목요일엔 꼬박 12시간을 일했다. “일주일 전에도 딸이 공장에서 불이 났다고 했었는데, 안전 조치가 미흡했던 것 아니냐”며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다. 공장 주변엔 주인 잃은 딸의 자동차가 주차돼 있었다.

같은 날 화성 서부경찰서 유가족 대기실엔 최연소 희생자 중국 동포 진짜이헝(김지현 ·23)씨의 외삼촌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2001년 헤이룽장성(흑룡강성)에서 태어난 김씨는 외동아들이었다. 외삼촌은 “지현이는 2001년 중국 헤이룽장성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던 소중한 아이였다”며 “외조카지만 20년 가까이 같이 살았기 때문에, 내게도 아들을 잃은 것과 같다”고 했다

김씨는 평소 한국 문학을 좋아해 충남 천안의 한 대학의 국문과에 유학 중이었다. 부모에게 손 벌리는 게 싫어 공장에서 5개월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외삼촌은 “부모에게 부담을 한사코 안 주려던 착하고 귀여운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부모는 모든 것을 잃은 상태”라고 했다.

한 40대 중국 동포 남성은 “사촌 누나들이 사고를 당했는데 시신을 어디서 확인해야 하느냐”고 했다. 이 남성의 친형과 사촌 누나 2명이 사고 공장에서 함께 근무했다고 한다. 그는 “명절 때마다 꼭 찾아봤던 누나들”이라며 “작은 누나는 이 공장에서 일을 했다가 중국에서 잠시 머무른 뒤 다시 복귀했다가 변을 당했다”고 했다.

[화성=강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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