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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自然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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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수의 매거진 레터]

학교 동창 모임에 나간 적 별로 없습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출세한 분들의 거만한 태도에 불편한 기분을 느낍니다. 몇 주 전 대학 학과 30년 후배들 앞에 설 기회가 있었습니다. 동창회 일을 열심히 돕는 동기가 "기자로 사는 이야기를 편하게 하면 된다" 해서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얘기하고 돌아오면서 '기자란 무엇인가?' 다시 생각했습니다.

입사 무렵 선배들이 말했습니다. "기자는 무관(無冠)의 제왕(帝王)"이라고. '소수 정예'란 말도 들었습니다. 제 경험에 비춰보면 '무관'은 맞는데 '제왕'은 아니더군요. '소수'일지 모르나 '정예'도 아니고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도 아닙니다. "기자와 정자(精子)의 공통점이 뭔지 알아?"라는 우스갯소리도 들었습니다. 정답은 "사람 될 확률이 지극히 낮다는 것"이라네요. 방송국 PD에게는 '선생'이라고 부르는데 기자는 '양반'이더군요. 최근 인터넷에서 기자를 두고 쓰는 표현은 차라리 생략하렵니다.

글 쓰는 직업엔 시인·소설가·작가·평론가 등이 있습니다. 다들 사람[人] 또는 일가[家]를 이룬 이들인데 기자는 어쩌자고 '놈 자(者)'자를 쓸까요. 기자가 사람이 되는 때는 세월이 흐르고 흘러 편집인 또는 발행인이 될 때뿐입니다. 역시 기자가 사람 될 확률은 지극히 낮네요.

그러나 '자(者)'를 쓰는 뜻이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란 뜻이라고요. '성자(聖者)'라는 말과 용례가 같습니다. 성인(聖人)이 아닙니다.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 같은 분은 성인이시지요.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인술을 펼친 이태석 신부 같은 분이 바로 성자입니다. 그러므로 낮은 자리에 거하는 기자만이 진정한 기자입니다. 거들먹거리는 기자가 주위에 있다면 "당신은 기자가 아니다"고 꾸짖어주세요.

여행하는 이는 거만할 수 없습니다. 거대한 산, 끝없는 바다를 보면서 겸손하지 않을 수 없지요. 저 자연 앞에서 절로 낮은 자리에 있을 수밖에요. 지난주 제주도를 취재하면서 여행기자는 '기자'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한수 주말매거진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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