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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14중창' 앙상블의 강렬한 風味, 로시니의 축제에 머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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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원의 오페라와 도시] 파리와 로시니

조선일보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 극장. 센 강을 끼고 유유히 흐르는 파리는 이탈리아 작곡가 로시니의 숨결이 살아있는 ‘문화의 도시’다. / 황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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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파리 최고의 명당에 위치한 투르 다르장(La Tour d'Argent) 레스토랑은 그 자체로 프랑스 미식의 역사이기도 하다. 1582년에 창업해 지금까지 전통의 조리법에 충실한 맛과 품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대대로 프랑스 왕실의 단골집이었으며 지금도 세계 각국의 셀러브리티들이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파리 미식의 영원한 랜드마크다.

여기서 탄생한 메뉴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로시니 스테이크(Tournedos Rossini)다. 이탈리아 최고의 희극 오페라 작곡가 조아치노 로시니의 이름을 붙인 것으로, 실제로 로시니가 개발 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다. 미식과 탐식의 경계에 선 음식이고 심지어 누구에게는 괴식(怪食)일 수도 있다. 놀랍도록 진한 풍미와 엄청난 칼로리를 동시에 자랑하는데, 들어가는 재료와 조리법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우선 최고급 필레 미뇽(안심)을 스테이크로 구워낸다. 그 위에 진한 풍미의 푸아그라를 얹곤 가니시로 버섯의 황제라 불리는 이탈리아 피에몬테산(産) 송로버섯을 슬라이스해 곁들인다. 마무리로 포르투갈 마데이라산 와인을 장시간 졸여 만든 데미그라 소스를 조금 부어주면 완성이다. 진한 재료 위에 더 진득하고 무거운 재료를 얹곤 다시 거기에 더욱 강렬한 풍미의 그 무엇을 가미하는 일종의 '옥상옥(屋上屋)' 요리다. 사실 로시니 오페라가 딱 이렇다.

로시니는 '이탈리아의 모차르트'로 불릴 만큼 천재 작곡가였다. '세비야의 이발사' '라 체네렌톨라' 등 감칠맛 나는 코믹 오페라로 이탈리아 전역을 제패하곤 당대 최고의 도시 파리로 초빙받아 날아간다. 로시니는 파리에서도 단숨에 수퍼스타가 됐다. 리드미컬한 음악 전개, 감각적이고도 흥겨운 선율, 귓가를 상쾌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절묘한 아리아, 서커스를 연상케 하는 화려하고도 흥겨운 초절 기교의 노래 등 버라이어티한 다중 매력을 지닌 그의 오페라는 단숨에 파리지앵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로시니 음악이 주는 거침없는 쾌락에 너무나 즐거워했다. 아예 동상까지 세워 그를 아이돌로 대접한다.

어느 날 로시니가 프랑수아 10세의 대관식을 위한 축전 오페라 한 편을 작곡했다. 사람들은 실망한다. 보나마나 왕의 덕성을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지루한 내용으로 가득 찬 작품이 될 터였다. 아니었다. 로시니는 역시나 로시니였다. 오페라 '랭스 여행(Il Viaggio a Reims)'은 왕의 대관식이 아니라 대관식이 열리는 상파뉴 지방 랭스로 몰려가는 사람들의 한바탕 소동을 다루고 있다. 전 유럽에서 몰려온 일행은 경유지 황금백합 호텔에서 발이 묶인다. 사람이 너무 몰려 랭스로 가는 마차 편이 전부 매진됐다는 것이다. 당황한 일행이 한데 얽혀 오페라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복잡한 앙상블을 노래한다. 14중창 '아, 예상치 못한 사태가(Ah, a tal colpo inaspettato)'다. 티롤 출신의 호텔 여주인, 프랑스 백작의 미망인, 영국·러시아·스페인·독일·폴란드 등지에서 몰려온 각계각층의 인물들이 마치 로시니 스테이크처럼 노래 위에 노래를 더하고, 음악 위에 선율을 더해 층층이 올려진 '칼로리 폭탄형 앙상블'을 연출한다. 로시니 오페라 최고의 명장면이라 부를 만하다.

요즘 파리 미식계는 가벼움이 트렌드다. 7구에 위치한 라르페주(L'Arpege)는 아예 육류 대신 채식 풀코스로 미쉐린(미슐랭) 별 셋을 획득했다. 사실 요즘 오페라의 경향도 그렇다. 파스텔톤의 옅고 화사한 무대 위에서 좀 더 시적인 서정과 정교한 연극성이 강조된 오페라가 더욱 각광을 받는 시대다. 그래도 가끔은 로시니 시절의 흥겨운 분위기가 그립기도 하다. 그건 '유럽의 수도'로 불리던 전성기 파리에 대한 심리적 향수이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때면 다시금 투르 다르장으로 발길을 돌려 진득한 소스가 가미된 육류 요리와 묵직한 와인으로 식사를 하곤 희미한 술 냄새를 풍기며 곧장 오페라 극장으로 걸어간다. 로코코 양식이 꽃처럼 흐드러진 아름답고 화려한 극장에서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로시니 오페라 한 편을 지켜본다. 그의 음악은 '지금 이 순간이 모든 것이며, 매일이 축제다'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건 참으로 파리와 어울리지 않는가. 로시니는 2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파리의 아이돌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듯하다.

[황지원 오페라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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