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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결혼하는 장남에게 집 내주고… 우리집에서 살겠다는 시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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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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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예전에 읽은 어느 베스트셀러의 제목이 그랬습니다. 지금 그 내용은 다 잊었지만, 제목이 갖는 울림은 어째 점점 더 크게 느껴집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개수의 사탕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 1 더하기 1은 2이고 1 빼기 1은 0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 어른의 삶도 한결 쉽게 풀리지 않을까요? 무게가 가벼워지지는 않아도, 셈이 간단해지기는 할 것 같습니다.

홍여사 드림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턱도 없는 일인데….

상견례 자리에서 저희 시어머님이 하신 말씀이십니다. 저보다도 저희 부모님이 더 놀라셨지만, 곧 그 속뜻을 이해하셨지요. 며느릿감이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아직 장가 못 보낸 장남이 마음에 걸려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요. 역혼은 절대 안 된다며, 3년 가까이 꿈쩍 않으시던 어머니셨습니다. 마지못해 허락을 하시고도 미련이 남으신 모양이었습니다. 어쨌거나 허락을 받게 되어 감사하면서도, 저는 어머님의 거리낌없는 표현에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상견례 이후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역혼'의 꼬리표는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어머님에게 저는 그냥 며느리가 아니라, 순서를 어기고 뒷문으로 들어온 새치기 며느리였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개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맏며느리를 들이기 전이라는 이유로 예물도 예복도 생략했고, 모든 절차가 간소화되어, 뜻하지 않게 작은 결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이후에도 상황은 같았죠. 집안의 유일한 며느리로서 소임은 분명했지만, 제 위치는 좀 어정쩡했습니다. '진짜 맏며느리 들어올 때까지만'이라는 단서가 늘 붙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이를 낳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아들이 아니라고 서운해하실까봐 걱정했는데, 어머님은 뜻밖의 말씀을 하시더군요. "아이고, 거 잘 됐다. 네가 먼저 아들 낳을까봐 걱정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데…." 저는 그 말씀이 다행스러우면서도 묘하게 씁쓸하더군요.

'역혼'은 하는 게 아니라더니, 옛말이 틀리지 않는구나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습니다. 하루빨리 '형님'이 들어오기를 바랄 뿐이었지요. 그러면 제게 맡겨진 '임시 맏며느리 자리'도 정당한 주인을 찾아갈 테니까요. 저도 저이지만, 어떻게든 마흔 전에 장남을 장가보내겠다는 어머님의 절박함은 안쓰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의 간절한 바람은 좀처럼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우리 부부가 어느새 결혼 10주년을 맞이했는데도 좋은 소식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임시 맏며느리 역할에도 이골이 나서, 이젠 임시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이고, 맏며느리에 대한 어머님의 상상과 기대도 한풀 꺾인 듯이 보였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역전 홈런포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주버님이 결혼을 하신다는 겁니다. 그것도 아홉 살 연하의 여성과. 물론 어머님은 크게 기뻐하셨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보다 한참 어린 형님이 들어온다는 게 약간 걸리기는 했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습니다.

결혼 준비는 척척 진행되는 듯했습니다.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제가 도울 일은 없었습니다. 어머님은 갑자기 10년은 젊어지신 듯이, 활기에 넘쳐서 며느리 들일 만반의 준비를 하시더군요. 눈치를 보아하니 저는 모르는 척 빠져주는 게 나을 듯도 했습니다. 옷 한 벌 안 해주고 들인 며느리 눈치가 보이실 듯해서요. 저도 굳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고요.

하여간 제가 아는 건, 아주버님 내외가 어머님 댁에 들어와 산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미 3년 전부터 아주버님이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이번에 새 식구가 들어오는 것이지요. 도배며 장판이며, 신혼집 단장을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런 얘기들을 전해 들으며 저는 기분이 묘했습니다. 이로써 나는 10년 맏며느리 역할을 내려놓게 되나보다 싶더군요. 지금껏 없던 형님이 갑자기 생긴다는 것, 더구나 그 형님이 어머님을 한 집에서 모신다는 것이 신기하고도 든든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좀 의아하기도 했습니다. 아니할 말로, 요즘 아가씨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했을까요. 혹시 내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나?

그 의문은 며칠 전, 일시에 풀려버렸습니다. 내가 모르던 사정이란, 나를 걸고넘어지는 사정이었습니다. 남편이 말하더군요. 형님 결혼하면 어머님을 우리가 모시자고요. 신혼부부에게 집을 내주고 어머님이 우리 집으로 오시기로 했다네요. 너무 기가 막혀 한참을 멍해 있는 저에게 남편은 말했습니다. "미리 얘기 못해서 미안한데, 다른 방법이 없다. 네가 이해해주라."

그날 저희 부부는 밤이 새도록 묻고, 답하고, 따졌습니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어머님의 장남 편애는 제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습니다. 남편 말대로라면, 어머니와 아주버님은 네 것 내 것이 따로 없는 사이였습니다. 문제는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관계라는 거죠. 지난 20년간, 형님은 벌기보다는 쓴 게 더 많았던 사람이고, 어머님이 갖고 있던 여유 자금도 이미 바닥난 상태랍니다. 그나마 집이라도 온전하게 남은 게 다행인데, 이제 그마저 내주려는 거랍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장남이니까, 모든 걸 다 내주셔도 할 말 없는데, 그럼 그 장남과 함께 사시지 왜 우리 집으로 오시느냐고요. 그러자 남편이 답답하다는 듯이 말하네요. 애초에 시어머니 모셔야 한다면 누가 시집오니? 그 나이에 번듯한 집 없다고 하면, 누가 와? 일단 장가는 보내야 할 거 아니야?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어머님 나름대로 현실적인 고민이 많으시겠지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화가 나는 건 어머님의 이중 잣대입니다. 베푸실 때는 무조건 장남에 맏며느리이고, 부담을 지울 때는 만만한 둘째인가요? 이러실 거면 최소한 정당한 며느리 대우는 해주셨어야 하지 않나요?

어머님만큼 이해 안 되는 게 우리 아주버님입니다. 이게 무슨 불효이자 민폐인가요? 적어도 그 집을 쪼개어, 어머니 거처는 마련해드려야 하지 않나요? 효도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 염치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불합리한 셈법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수용해야 하는 현실. 혈육끼리는 가능한지 몰라도 저는 그게 안 되는데, 제가 너무 이기적인 건가요?

이메일 투고 mrsh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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