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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7 (월)

얼기설기 꿰맨 듯… 아보카도가 씹히는 게 제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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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의 생각하는 식탁] (21) 과카몰레

'덴'은 야구 모자를 삐딱하게 썼다. 눈이 부리부리했다. 게다가 키까지 커서 운동선수 폼이 났다. 그런데 생김새를 보면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인 느낌이 났다. 검은색 눈동자와 하얗기보다는 노란 피부색 때문이었다. 그는 멕시칸 레스토랑의 주방장이었다. 그러나 멕시칸 레스토랑은 몇 달 뒤 오픈이었다. 그전까지 그는 내가 일하던 레스토랑 한편에 자리를 내고 메뉴를 개발했다. 두 레스토랑의 오너가 같은 탓에 가능한 일이었다.

"헤이!"

우리보다 늘 조금 늦게 출근하던 그의 인사는 활기찼다. 그가 불끈 쥔 주먹을 허공에 올리면 으레 답례로 주먹을 내밀었다. 그러면 그는 씩 웃으며 "오늘 어때?"라고 되묻곤 했다. 그 후에는 뒤 주방에 가서 재료를 가져다 놓고 한참 생각을 하다 이것저것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다 손님이 밀어닥쳐 한창 바빠지면 덴은 우리가 일하는 주방으로 뛰어들어 왔다. 어슬렁거리며 생색 내는 자세가 아니었다. 그러고는 빠른 어조로 물었다.

"뭘 도와줘야 하지?"

"아, 음, 일단 저것부터 튀겨줄래?"

"예스!"

명색이 주방장인데도 허드렛일을 피하지 않았다. 어떤 일을 주든 깔끔하게 해치웠다. 그가 오면 마음이 놓였다. 일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제대로 하니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한편 나는 지쳐갔다. 덴과 같이 일하기 시작한 때는 호주 멜버른의 가을, 지구 반대편 한국의 봄이었다.

크리스마스가 끼어 있는 미친듯한 겨울, 그러니까 멜버른의 여름을 보내고 난 가을은 허전하고 쓸쓸했다. 짧고 얇은 수영복을 입고 해변가를 거닐던 사람들은 차분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책을 보며 카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손님이 줄어든 주방은 분위기가 나빠졌다.

본래 주방은 인력이 나가고 들어오는 주기가 짧다. 그런데 손님이 적다고 나간 인원을 보충하지 않으니 주방 식구는 점차 줄어들었다. 그럴수록 한 사람이 맡아야 할 일은 더욱 늘어났다.

근무 시간도 비례해 길어졌다. 주방 밑바닥을 막 벗어난 나에게도 일이 쏟아졌다. 한 끼도 먹지 못한 채 온종일 일하다 퇴근하는 날이 잦아졌다. 스트레스지수가 높아진 주방에서 홀로 일을 해나갈수록 몸과 마음이 피로해졌다. 채워지지 못하고 끊임없이 소모되는 것 같았다. 주방에서 홀로 매일 밝게 인사하는 덴을 보면 '아예 종족이 다른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덴은 큰 돌절구를 꺼내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매번 주방 구석에 놓여있던 돌절구였다.

"뭘 만들려고?"

"진짜 과카몰레를 만들 거야."

"과카몰레?"

"과카몰레 몰라? 나초 찍어 먹는 아보카도 디핑 소스! 나초는 알지? 옥수수 과자."

과카몰레를 되묻는 나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는 동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덴은 그 와중에 아보카도 디핑 소스(dipping sauce)라고 부연 설명을 했다. 아보카도 원산인 남미에서 오래전부터 만들어진 음식인 과카몰레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음식이다. 나초를 찍어 먹어도 좋고 샐러드처럼 과카몰레만 퍼먹어도 된다. 구운 닭고기와도 궁합이 잘 맞는다.

미국에서는 미식축구 결승이 열리는 수퍼볼(Superbowl) 기간에 판매량이 급증한다고 할 정도로 대중적인 음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 과카몰레를 그전까지는 몰랐다. 나는 동료들의 시선이 참기 힘들었다. 뭔가 모르는 것이 나올 때마다 그들이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앞에서는 아는 척하고 몰래 화장실에 들어가 휴대폰으로 조리법을 검색해본 적도 많았다. 그러나 이때 나는 나의 무지를 숨기지 못했다. 덴은 어이없다는 표정도, 그럴 줄 알았다는 비웃음도 짓지 않았다. 대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배우고 싶어? 그럼 내가 가르쳐 줄게. 진짜 과카몰레 만드는 법을."

덴은 빨간 양파, 라임, 잘 익은 아보카도, 빨간 고추, 토마토, 그리고 고수 한 다발을 준비했다.

"진짜 과카몰레를 만들려면 이게 있어야 해."

덴은 듬직한 무기라도 되는 듯 돌절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현대 주방에는 각종 첨단 장치가 난무한다. 4마이크론(1㎜의 1000분의 1) 크기로 재료를 갈아주는 믹서, 마력 단위가 붙는 반죽기, 이틀 내내 돌려도 고장이 나지 않는 첨단 오븐까지 일반 주방에서는 상상도 못할 비싼 기구들을 써서 음식을 만든다. 그중 투박하고 무식하기까지 한 돌절구는 유난히 튀는 기구였다.

덴은 먼저 양파와 고추, 고수를 잘게 다졌다. 잘 익은 토마토는 속을 파낸 뒤 역시 작은 네모 모양으로 잘랐다. 그러고는 이 모든 재료를 돌절구에 집어넣고 빻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말이지 이래야 세포막이 찢겨서 더 맛이 제대로 나는 거야."

거친 돌절구에 찢긴 양파와 고수에서 맵고 아린 맛이 올라왔다. 그러고는 큼직하게 자른 아보카도를 넣고 쿵쿵 소리를 내며 찧기 시작했다. 덴이 과카몰레를 만드는 모습은 믹서에 넣고 갈 때와는 달리 진짜 뭔가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 버튼 하나만 누르면 끝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 공이를 들고 내리찧어야 했다. 그 원초적인 움직임은 주술적이었다. 그리고 음악을 듣는 듯했다. 익숙한 주방의 노래였다. 칼로 도마를 두드리고 절구를 찧는, 가슴을 울리는 태초의 소리가 들려왔다. 뜨거운 태양 아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옛날 잉카 제국의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덴은 찧기를 멈추고 라임즙을 섞고 소금간을 했다. 그는 전투에서 이긴 장수처럼 의기양양하게 과카몰레를 내 앞에 내밀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과카몰레 맛을 봤다. 첫맛은 고소했다. 지방 함량이 15%에 육박하는 아보카도 덕분이다. 자칫 느끼할 수 있는 그 맛을 아린 양파와 신 라임즙이 상쇄했다. 토마토는 단맛, 고추는 매운맛으로 포인트를 주니 숟가락으로 퍼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이제 알겠지? 과카몰레는 이렇게 만드는 거야."

덴은 큰 입을 찢으며 웃었다.

사실 믹서를 써도 돌절구에 빻은 것과 비슷한 맛이 난다. 문제는 질감이다. 과카몰레는 아보카도 덩어리가 느껴져야 한다. 죽처럼 부드러운 게 아니라 입에서 씹히는 맛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믹서를 쓰면 그 질감을 만들기가 까다롭다. 씹히게 만든다 하더라도 입자 크기가 균일하게 나온다. 그러면 재미가 없다. 얼기설기 꿰맨 것처럼 일정하지 않은 입자 크기가 과카몰레의 재미요 맛이다. 그래야 고소하고 기름지며 맵고 시큼한 이 화려한 음식의 맛이 산다. 통제하고 재단하면 시들어버리는 젊음처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놀듯이 만들어야 맛이 나는 음식이다.

반면 한국은 주재료가 되는 아보카도와 라임이 귀한 탓에 과카몰레 자체가 드물다. 간혹 발견해 먹으면 시지 않고 짜지 않으며 잘 익지 않아 고소하지도 않은 아보카도를 써 무미건조하기가 일쑤다.

그러면 덴과 함께 만들었던 그 과카몰레의 화려한 맛과 마지막으로 그와 나눈 대화가 떠오른다. 레스토랑을 옮기던 날, 덴은 큰일이 난듯 호들갑을 떨며 나를 붙잡고 말했다.

"너희 나라 전쟁 나는 거 아냐? 북한이 미사일 쐈던데?"

"아니. 괜찮아. 맨날 있는 일이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미소까지 띠며 답했다. 덴은 아리송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몇 년 전 그날에도 북한은 미사일을 공해상으로 쐈고 호주 현지 방송에서는 내내 생중계를 했다. 지척에서는 미사일이 날고 태양은 먼지로 가려진 이 땅, 이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며 사는 내가 오히려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상한 줄도 모른 채 뛰지 않는 가슴을 품고 무표정하게 하루를 보낸다.

*돈차를리(070-4219-4475): 서울 경리단길의 돈차를리는 멕시칸 주방장이 직접 요리를 하는 몇 안 되는 레스토랑이다. 영어로도 주문을 받는 점원도 이국적이다. 맛 역시 숨김 없는 강렬함 그 자체다. 과카몰레는 기본, 종류별로 타코를 시키고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본토 데킬라를 곁들이면 더욱 좋다.

[정동현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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