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콘을 먹을 수 없는 때도 있다. 기자 시사회다. 팝콘을 먹지 않는다는 엄숙한 불문율이 있다. 한번은 과감하게 팝콘을 들고 들어갔다 낭패를 봤다. 기자들은 웃기는 장면에서도 잘 웃질 않는다. 너무 조용해 씹는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녹여 먹었다.
며칠 전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열렸다. 최고의 영화와 영화인을 뽑는 자리다. 올해부터 나도 투표 위원이 됐다. 백인 남성 중심이라 인종 및 성차별 논란에 휩싸인 과거를 쇄신하려 나 같은 변방의 평론가들이 영입됐다. 깍두기다.
올해 뮤지컬/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은 ‘서브스턴스’의 데미 무어가 받았다. 젊음을 되찾으려는 한물간 배우가 주인공인 호러 영화다. 호러 같은 장르 영화는 시상식 후보에 잘 오르지 못한다. 장르 영화에 주로 출연하는 배우도 그렇다. 그는 45년 경력에서 한 번도 연기상을 받은 적이 없다.
데미 무어는 말했다. “30년 전 한 제작자는 저를 ‘팝콘 여배우’라 불렀습니다.” 연기는 별로고 흥행은 되는 가벼운 배우라는 비하다. 나도 그에게 투표했다. 물론 압도적 연기였다. 더해서 나 역시 팝콘 영화의 팝콘 여배우가 수상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나는 올해 막 쉰이 됐다. 세상 이치를 깨닫는 나이라 지천명이다. 이치는 무슨, 고치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기분이다. 말도 글도 가볍다. 나이가 들면 무거워져야 한다는 강박에 한동안 시달렸다. 데미 무어를 보며 생각을 바꿨다. 모두가 메릴 스트리프가 될 수는 없다. 모두가 바위처럼 살 수는 없다. 세상에는 팝콘 같은 사람도 필요할 것이다. 매번 팝콘 같은 글을 쓰는 자의 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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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훈 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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