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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6 (월)

마음이 불안하고 힘들 때 침입하는 ‘확신’의 정체 [.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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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관계 사고’가 있으면 자신만의 상상 체계를 만들고 이를 통해 부정적이거나 피해의식을 갖고 현실을 해석하게 되어 예민해지며, 우울이나 불안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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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씨는 50대 여성으로 남편과 두 아들을 두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가슴이 뻐근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가슴을 만져보니 오른쪽 가슴 아래쪽으로 멍울 같은 것이 만져지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 없던 멍울이 만져지니 영주씨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주씨의 사촌 언니가 유방암으로 몇년 전에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인근 병원에 방문해 진찰을 받고 유방 초음파를 했는데 의심스러운 병변이 관찰되었습니다. 큰 병원에 가서 조직 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여 진료의뢰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영주씨는 서둘러 큰 대학병원을 예약해 두달 뒤로 초진 예약을 잡았습니다. 진료일을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가슴에 있는 작은 멍울이 온몸으로 퍼지는 꿈을 자주 꾸었고, 식은땀을 흘리며 깨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는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듯하고 입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길을 가다가 옆 사람이 자신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걱정이 가득하시군요. 가슴에서 생긴 두려움이 몸을 휘감고 있습니다.” 영주씨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누구신지요?” 영주씨가 그를 바라보자 그 사람의 얼굴 주위에서 영험한 빛이 휘감겨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사람의 운명을 다루는 점술가입니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주씨는 그를 따라 오래된 사당과 같은 곳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절을 했고, 절값으로 돈을 지불한 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는데, 남편은 말도 안 되는 돈을 썼다며 영주씨에게 화를 냈습니다. 영주씨는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에 그렇게 했는데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남편에게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자신이 바보처럼 사기를 당했다는 생각도 들어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뒤 영주씨는 대학병원에서 조직 검사 후 정상이라는 진단 결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우연히 점술가의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었는데, 너는 은혜를 모르는구나!” 꿈에서 점술가는 영주씨를 무섭게 노려보며 고함을 쳤습니다.



다음날 영주씨는 친정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셨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주씨가 너무 놀라 점술가에게 전화했더니, 점술가는 그에게 더 크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영주씨는 이전보다 10배나 큰돈을 내고 제사를 지냈지만, 친정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점술가는 영주씨에게 정성이 부족하다며 더 자주 자신을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주씨는 자신과 가족에게 해가 일어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점술가를 만나 절값을 주어야 했습니다. 이제는 매사가 불안하고 초조해서 잠시도 있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점술가를 만나지 않으면 큰 병에 걸릴 것 같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남편이 영주씨를 인근 정신건강의학과에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영주씨는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검사상 불안과 건강염려증이 매우 높은 상태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관계 사고’(idea of reference)가 심한 것으로 진단되었습니다. 관계 사고란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 또는 환경 현상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기 위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행동·현상이 객관적으로는 자신과 무관한데도 스스로 연결 고리를 찾고 이를 사실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관계 사고가 있으면 자신만의 상상 체계를 만들고 이를 통해 부정적이거나 피해의식을 갖고 현실을 해석하게 되어 예민해지며, 우울이나 불안이 심해질 수 있습니다.



영주씨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유방암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항상 있었습니다. 유방암일 가능성이 있는 병변이 발견되면서 불안은 증폭되고 관계 사고로까지 진행했습니다. 관계 사고로 인해 유방암으로 진단되지 않은 것과 점술가와 함께 제사를 지낸 행동을 강하게 연결시켰습니다. 불안이 심한 분들은 관계 사고가 발생하면 서로 무관한 일들을 연결 짓고 서로의 관계를 사실로 확신하는 그릇된 신념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관계 사고의 프레임에 자신이 사로잡히게 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누군가가 결정해주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이를 결정해주는 사람은 불안한 사람을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관계 사고에 끌려 들어가면 사실과 사실이 아닌 일을 혼동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실과 사실이 아닌 일을 잘 구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별개로 일어나는 사건을 서로 묶음으로 연결시키는 일에 주의해야 합니다. 세상의 많은 일은 무작위로 일어납니다. 유방에서 멍울이 만져지더라고 80% 이상이 유방암으로 진단되지는 않습니다. 영주씨처럼 조직 검사상 유방암으로 진단되지 않은 경우 또한 점술가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관계 사고가 발생하면 위와 같은 관계 이외에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면 나를 감시하거나 의식하는 듯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영주씨는 정신건강의학과 검사와 치료를 통해 자신이 관계 사고로 서로 무관한 일들을 연결 짓고 불안을 줄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치료 전에는 길을 걸을 때도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수군거리거나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치료 후 그런 증상이 없어졌습니다. 또한 점술가에게 의지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어 그간의 기나긴 타인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불안하고 힘들 때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관계 사고를 확인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인별로 자세한 것은 반드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진료, 상담하면서 파악해야 합니다. 기사만 읽고 자기 자신을 진단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기사에 나오는 사례는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경우를 통합해서 만들었습니다. 모두 가명을 쓴 것임을 밝힙니다.



한겨레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 [한겨레S]에 연재됐던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사이’가 [.txt]로 지면을 옮겨 4주마다 독자를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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