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아무튼, 레터]
알전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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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처럼 하얀 탁상 달력을 책상에 반듯하게 올려 놓았다. 새로운 365일이 펼쳐져 있지만 활주로에서 이륙하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무안공항 참사 이후 국가 애도 기간이 끝나도 한동안 그럴 것이다. 비극은 숙연하게 삶을 근본부터 돌아보게 한다. 옷깃을 여미고 제대로 슬퍼해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시인이라고 해서 샘물처럼 시가 날마다 솟아나진 않는 모양이다. 이정록 시인은 시가 써지지 않을 때마다 시내버스를 탄다. 구불구불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온다. 시간 낭비는 아니다. 올 때는 갈 때 보지 못한 반대쪽 풍경을 천천히 볼 수 있다. 그렇게 세상의 이쪽과 저쪽을 읽는 것이다.
그래도 시가 안 써지면 재래시장에 간다. 돼지국밥에 소주 한 병. 그만한 보약(?)이 없다고 한다. 시인은 좌판 구석구석에서 오고 가는 오래된 말씀들도 엿듣는다. 흥정의 리듬과 침묵과 줄다리기와 방점을 배운다. 시의 광맥이 그곳에 있다. “환한 알전구 하나 빼서 어두운 내 문장에 박아 넣는다”고 이정록 시인은 썼다.
고백하자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거나 자극이 필요할 때 남대문시장에 가곤 한다. 물건을 사고팔고 실어 나르는 사람들로 온종일 북적이는 시장 골목에 들어서면 정신이 번쩍 난다. 내 일터와는 다른 세상의 호흡, 생활의 맥박이라고 할 만한 표정과 대화, 동작과 속도를 발견한다. 노트북이나 스마트폰만 바라보다가 부족해진 활기를 그곳에서 보충한다.
희망 한 단에 얼마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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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이 희망을 압도할 때 듣는 노래가 있다. 장사익이 부른 ‘희망 한 단’. 김강태 시 ‘돌아오는 길’에 곡을 붙인 이 노래는 “춥지만, 우리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색칠하기/ 한참을 돌아오는 길에는/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아줌마, 희망 한 단에 얼마래요?”로 흘러간다. 막막한 하루였을 것이다. 오죽하면 좌판에서 희망을 살 생각을 했겠는가.
그런데 채소 파는 이 아줌마, 보통내기가 아니다. “희망요? 나도 몰라요” 하던 아줌마는 “희망 한 단에 얼마예요?”라고 자꾸 묻자 이렇게 답한다(말씨가 충청도 아줌마다). “희망유? 채소나 한 단 사가슈~ 선생님~” 채소 파는 아줌마에게는 채소 한 단이라도 사가는 사람이 희망일 것이다. 내 희망만 찾을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것. 세상의 이쪽과 저쪽을 읽듯이, 손바닥을 뒤집듯이 그렇게도 살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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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돈규 주말뉴스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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