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원근 일병 사망을 둘러싼 군의 자살 조작 논란과 관련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박래군 조사3과장(왼쪽)과 김준곤 위원 등이 2002년 9월2일 의문사위 사무실에서 기자들을 상대로 정례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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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가 조사해야 할 사건은 모두 85건이었고, 내가 맡은 조사3과는 ‘강제징집-녹화사업’ 관련 의문사 6건(정성희, 이윤성, 한영현, 한희철, 김두황, 최온순)을 포함해 모두 28건이었다. 조사는 막바지로 가고 있었지만, 몇몇 사건 외에는 지지부진했다. 일단 자료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의문사위로서는 국가정보원(옛 중앙정보부·안기부)이나 국군기무사령부(옛 보안사), 검찰의 자료를 확보해야 했지만, 협조 요청으로는 그들 기관을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 과는 국방부 자료실까지는 실지조사를 할 수 있었지만, 기무사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녹화사업 업무일지’ 눈앞서 놓쳤다
2002년 8월19일 밤, 보안사 3처5과장을 지냈던 서의남씨가 1983년 3월부터 3개월간의 녹화사업을 진행한 업무일지를 갖고 있음을 우리 과 조사관이 확인하고 보고했다. 보안사 3처5과는 녹화사업 전담부서였다. 녹화사업은 시위를 하다가 강제징집된 대학생들의 사상을 개조하고, 프락치로 활용했던 군 보안사의 프로젝트였다. 그의 업무일지는 중요한 기록물이었다. 다음날 그에게 업무일지 제출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으나, 그는 이미 그 업무일지는 소각해서 없다고 발뺌을 했다. 업무일지를 불태우는 사진 세장도 같이 보내왔다. 그런 뒤에 그는 연락도 끊고 집에서도 사라졌다.
우리는 그의 집에 찾아가서 실지조사를 하려고 했으나, 방법이 없었다. 나는 기자들에게 “눈앞에서 역사적인 기록물을 확인해 놓고도 입수할 방법이 없다. 우리는 통화내역을 조회할 수도, 차적을 조회할 수도 없고, 계좌추적도, 압수수색도 불가능하다”고 호소했다. 의문사위는 서씨를 공개 수배했으나, 그는 의문사위 활동이 종료될 때까지 행적을 감추었다. 지금도 너무도 아쉬운 대목이다. 의문사위는 그만큼 힘이 없었다.
녹화사업에는 필경 고문과 같은 폭력이 뒤따랐다. 강제징집되어 모든 언행을 감시받으면서 부대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보안사 지프에 실려서 과천이나 서울 퇴계로 진양상가 등에 있는 보안사 안가로 끌려간다. 거기서 어떤 이는 가자마자 폭행을 당한 뒤에 유서까지 써놓고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러다가 회유를 한다. 휴가를 줄 테니 학교에 가서 이런저런 동향을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고문과 협박 끝에 운동조직의 비밀을 실토하거나 허위 자백 뒤에 괴로움으로, 또는 그렇게 활용당할 것에 대한 괴로움으로 죽음을 택한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강제징집-녹화사업의 입안과 실행에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지시가 있었다. 그래서 최종적인 책임을 묻기 위해서 전두환, 노태우에게 위원회에 출석하여 조사받을 것을 요구했으나, 그들은 출석하지 않았다. 그래서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에서 쓸 수 있는 권한을 다 쓰기로 했다. 먼저 동행명령장을 발부받아서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전두환, 노태우 자택을 찾아서 전달했다. 동행명령에 응할 리가 없었다. 그다음으로 쓸 수 있는 카드는 과태료였다. 전두환 1천만원, 노태우 7백만원의 과태료를 통지했더니 즉각 납부했다. 전두환은 통장에 29만원밖에 없다고 했는데도 1천만원의 큰돈을 일시에 납부했다.
2002년 9월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노태우 전 대통령 집 앞에서, 대학생 강제징집-녹화사업과 관련해 노 전 대통령에게 동행명령서를 전달하기 위해 찾아온 박래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과장(오른쪽)이 경비책임자한테서 “집에 없다”는 말을 듣고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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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명령장 모르쇠 전두환·노태우
강제징집-녹화사업-선도공작의 피해자는 얼마나 될까? 당시에는 1300여명의 명단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최근 2022년 11월에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2921명의 명단을 파악했다고 발표했다. 보안사는 이들을 일일이 A, B, C 등급으로 분류해서 관리하거나 활용했다. 법적인 근거도 없이 불법으로 약 20년 동안 국가권력이 행한 범죄였다.
시국과 관련한 사건이 아닌 경우의 군의문사 사건들은 대체로 신변을 비관하여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낸 사건들이 많았다. 하지만 사건을 조사해보면, 군 헌병대의 조사결과는 의문이 많이 남았다. 그중에 가장 이상한 사건은 단연코 허원근 일병 사건이었다.
군 당국의 발표로는 1984년 4월2일, 강원도 화천의 한 지오피(GOP)중대 유류고에서 오른쪽 가슴과 왼쪽 가슴에 M16으로 한발씩 쏘고도 죽지 않자, 머리에 총을 쏴서 자살했다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는 믿을 수가 없었다. 군 생활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조사관도 처음부터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주변 정황들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먼저 가장 맞지 않는 부분은 세발을 쏴서 자살했다고 했는데 발견된 탄피는 두발밖에 없었다. 사망했다는 날 총성을 청취한 것도 두발이었다. 그러니까 한발이 사라졌다.
또, 군 당국에서 밝힌 사망일 하루 전인 4월1일 밤에 중대장실에서 술자리가 있었고, 중대장 전령이었던 허원근 일병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 자리에서 중대장과 노아무개 중사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4월2일 아침에 중대원들이 막사 물청소를 했다는 사실 등을 확인했다. 중대본부 요원들은 사건 발생 이후에 헌병대에 끌려가서 혹독한 체벌을 당해야 했다. 이런 모든 정황은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자살이 아닌 타살. 그 자리에 있었던 전아무개씨와 이아무개씨가 술자리에서 오발사고가 있었음을 시인하는 진술을 했다. 하지만 중대본부의 병사들 대부분은 입을 맞춘 듯이 허 일병이 자살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조사활동 기간이 만료되어 가는데, 더 이상 사건 조사에 진전이 없어서 답답했다. 이 사건만은 밝히고 싶은 욕심이 컸다. 8월 우리는 사건 조사 중간결과를 발표했다. “이 사건의 목격자를 찾습니다. 제보를 기다립니다”라는 내용으로 언론들 앞에서 사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언론들에서는 대서특필했다.
자살과 타살 오간 허원근 일병 사건
그런데 조선일보가 의문사위 조사결과를 반박하기 시작했고, 국방부도 신속하게 ‘허원근 사망사건 특별조사단’(단장 정수성 중장)을 구성하여 의문사위의 조사결과를 반박하고 나섰다. 국방부는 의문사위의 조사결과가 군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내의 저명한 법의학자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타살이 아닌 자살임을 다수결로 정했다. 타살임을 주장하는 의견은 쉽게 묵살당했다. 그리고 헬기까지 동원해서 현장 재연을 했다. 그들은 헬기로 움직였지만, 우리는 자동차로 힘들게 현장에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화천의 현장으로 가는 길에는 한겨레신문의 김훈 기자가 동행했다. 화천 현장 검증에는 이 사건 핵심 증인인 전아무개씨와 이아무개씨가 동행했다. 그런데 이아무개씨는 화천에서 돌아갔다. 김훈 기자는 그의 칼럼에서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썼다.
“이 사회에서 누가 나를 보호해 줄 것인가”라며 이씨는 지오피(GOP)로 올라가기를 거부했다. 전씨는 “네가 가버리면 나 혼자서 이 사태를 어떻게 감당하겠느냐. 제발 함께 가자”며 이씨에게 매달렸다. 옛 전우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이씨의 선택은 현명해 보이기도 한다. “누가 나를 보호해 주겠느냐”던 이씨의 불안은 틀린 걱정은 아니었다.
그해 11월 국방부 특조단은 다시 자살이 맞는다고, 의문사위의 조사결과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의문사위는 최종적으로 허원근 사건은 기각 결정을 내렸다. 민주화운동 과정 중에 사망한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2003년에 재개된 2기 의문사위에서 재조사하여 역시 타살 결론에 이르렀다. 그 뒤 유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는데, 1심은 타살, 2심은 자살로 오락가락했다. 2015년 9월에 대법원은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지만, 부실수사 책임이 당국에 있다고 인정하여 국가가 유가족에게 배상할 것을 결정했다. 국방부는 2017년 4월에 허원근 일병이 사망한 지 33년 만에 순직을 결정했다. 22살의 건장한 청년, 휴가를 하루 앞두고 죽은 청년 허원근과 같은 억울한 죽음이 참으로 많다.
김훈 기자는 소설 ‘칼의 노래’로 이름을 날리던 그 소설가다. 그는 허름한 옷을 걸치고 구부정한 아저씨의 모습으로 의문사위 아무 곳에서나 원고지에 연필로 기사를 썼다. 그리고는 팩스를 신문사에 보내야 하는데 팩스 쓸 줄을 몰라서 부탁하고는 했다. 그 부탁을 들어주다가 친해졌다. 그때의 인연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의문사위에 고마워할 일이다.
박래군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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