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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0 (토)

모로코에 가면…복잡해서 길을 잃고 화려해서 넋을 잃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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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푸르고 붉은 땅

매혹의 나라 모로코

조선일보

페즈 초우아라(Chouara) 가죽염색공장. 냄새 고약한 표백제와 염색제로 가죽을 물들이는 공장이다. ‘복잡하고 다양한 화려함’이라는 모로코의 매력이 이 사진에 담겨 있다. /박종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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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시대를 풍미했던 프랑스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죽었다. 2008년이다. 유해는 생전에 그가 사랑한 북아프리카에 있는 한 고대 도시 속 프랑스풍 정원에 산골됐다. 도시 이름은 마라케시(Marrakech)다.

둘. 킬러에 쫓기던 제이슨 본(맷 데이먼)이 지붕과 지붕 사이를 펄펄 날아다니며 달아나던 곳은 탕헤르(Tanger) 구도심 메디나였다(‘본 얼티메이텀’). 자기가 누군지 누가 자기를 죽이려 드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제이슨은 그렇게 생존을 위해 도주했다.

셋. 천하무적 이선 헌트(톰 크루즈)는 카사블랑카(Casablanca) 뒷골목을 헤집고 다녔다. 경사진 골목길에서 자동차가 허공으로 날아올랐을 때, 앞에는 거대한 이베리아풍 모스크가 보였다. 모스크 이름은 하산 2세 모스크다. 이선은 모스크에서 오토바이를 훔쳐 타고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미션 임파서블:로그 네이션’)

그리고 넷. 험악했던 1940년대, 바로 그 카사블랑카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리처드 블레인(험프리 보가트)은 유부녀가 된 옛 연인 일자 룬드(잉그리드 버그먼)를 만나 운명의 탈출 작전을 도와준다. 리차드, 그러니까 릭이 운영하던 카페 이름은 ‘릭의 카페(Rick’s Cafe)’다.

마라케시, 탕헤르 그리고 카사블랑카. 이들이 있는 나라는 모로코다. 이 나라로 잠깐 틈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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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송윤혜


매혹적이고 복잡한 근원

1492년 1월 2일 이베리아 반도에 있던 이슬람 왕국 그라나다가 함락됐다. 800년 동안 지배했던 땅이었다. 카스티야와 아라곤 연합 왕국을 비롯해 전 유럽 기독교 세력은 800년 만에 이베리아 반도를 이슬람에서 반환받았다. 레콩키스타(Reconquista), 고토 회복이라고 한다.

그날 술탄 무하마드 12세 보압딜은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여왕에게 그라나다를 넘기고서 반도 남쪽 산중 고개를 넘었다. 고갯마루에서 알람브라 궁전을 뒤돌아보며 술탄이 운다. 옆에 있던 어머니가 꾸짖는다. “남자답게 지켜내지 못하고서 여자처럼 울어대는구나!”

그 고개 이름이 ‘무어인의 탄식길(Puerto del Suspiro del Moro)’이고, 술탄이 지중해를 건너 정착한 곳이 모로코 땅이었다.

한때 유럽을 지배했던 웅장함과 초원을 돌아다니던 베르베르족의 유목 문화, 이슬람의 정교함과 근대 유럽에 지배당했던 식민 문화까지 모로코에 두루 융합돼 있다. 모로코 사람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잠깐 들렀다 떠나가는 여행자들에게는 호사도 그런 호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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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헤르 전망대. 왼쪽은 대서양이고 오른쪽은 지중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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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1: 공기에 흐르는 자유로움, 탕헤르(Tanger)

영어 발음은 탠지어인데 대개 스페인식으로 탕헤르라고 부른다. 유럽과 가장 가까운 아프리카 도시다. 지중해 서쪽 끝인 지브롤터 해협 남쪽이 탕헤르고, 북쪽이 스페인 도시 타리파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가 산맥 하나를 찢어놓는 바람에 지중해가 터지고 지브롤터 해협이 생겨났다고 한다. 탕헤르에는 헤라클레스가 찢어놓은 산맥 끝자락이 동굴로 남아 있다. 이름은 당연히 헤라클레스 동굴이다. 동굴 위쪽 전망대에 서 보면 왼쪽이 대서양이고 오른쪽이 지중해다.

제국주의 유럽 그 어느 나라도 이 도시를 감히 독점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1923년 결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은 탕헤르를 국제 자유도시로 선언하고 독점권을 포기했다. 모로코 땅 대부분이 프랑스와 스페인 보호령이 됐지만 탕헤르만은 독립을 유지했다. 그런 국제도시답게 전 세계 간첩들이 탕헤르에서 활동했다. 온갖 첩보 영화를 탕헤르에서 찍었다. 제임스 본드도 탕헤르에서 활약했고 제이슨 본도 탕헤르에서 활동했고 최근에는 늙은 ‘인디애나 존스’도 탕헤르에서 나치 잔당과 대결을 벌였다.

제이슨 본이 헤맸던 탕헤르 구도심 메디나에는 이븐 바투타가 잠들어 있다. 마르코 폴로니 콜럼버스니 하는 유럽인들은 발치에도 못 가는 위대한 탐험가다. 그 무덤은 굉장히 초라하고 메디나 골목골목을 샅샅이 뒤져야 나온다는데, 나는 찾지 못하고 메디나를 탈출했다. 메디나에서 길 한번쯤 잃어줘야 모로코 여행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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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도시’ 셰프샤우엔. 도시 전체가 엽서에서 튀어나온 듯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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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2: 푸른 도시, 셰프샤우엔

이베리아에서 레콩키스타 전쟁이 시작되던 1471년, 포르투갈 군대가 모로코를 공격했다. 그때 이베리아에서 쫓겨나 모로코에 정착했던 유대인과 무슬림들이 함께 성채를 쌓고 포르투갈에 저항했다. 그 성채가 푸른 도시 셰프샤우엔(Chefchaouen)이다.

전쟁이 잦아들고 나니 인구가 적었던 유대인들은 외곽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런데 도시 색깔은 푸르다. 이스라엘 국기에 나오는 그 색깔, 다비드의 별 색깔이다. 왜 푸른지는 아무도 모른다. ‘도시를 건설할 때 유대인은 건물 아래, 무슬림은 건물 위쪽을 자기네 색으로 칠하기로 했는데 유대인들이 키가 너무 커서 전부 파랗게 칠하고 말았다네… 1930년대 나치로부터 도망친 유대인들이 칠했다네… 모기가 많아서 물색으로 칠했다네…. 설명이 제각각이고 엉망진창이지만, 어찌 됐건 셰프샤우엔 시 당국은 2년마다 한 번씩 도시 전체를 푸른색으로 칠한다. 다른 색은 금지다. 눈 감고 셔터를 눌러도 그림 같은 사진이 나온다. 소문난 골목은 줄 서서 기다릴 정도인데, 지구를 휩쓸고 있는 중국인 단체 여행객들이 앞에 있으면 기다리지 말고 지나가는 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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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도시’ 마카레시 뒷골목.


#매혹3: 붉은 도시 마라케시

마라케시는 붉다. 고대 도시 마라케시는 1062년 베르베르인이 세운 무와히드 왕국 수도였다. 도시 전체가 붉은색이다. 옹기를 굽는 황토 색깔 이다. 이 또한 관광 상품으로 소문이 나서 시 당국은 다른 색으로 도색을 금지한다. 무와히드 왕조는 마라케시를 중심으로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했다. 그때 왕조는 거대한 모스크를 건설했는데, 이들이 축출되고 기독교 세력은 그 모스크를 성당으로 개조했다. 그 성당이 세비야 대성당이다.

마라케시 메디나에 그 왕조가 세운 거대한 모스크가 있다. 쿠투비아 모스크다. 1147년 시작된 건축은 1154년 완성 일보 직전에 중지됐다. 모스크가 메카를 향해야 하는데 5도 틀어져 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재건축을 했는데, 근세에 정밀하게 실측해 보니 신축 모스크는 10도나 틀어져 있는 게 아닌가. 그래도 사람들은 메카를 향해 앉아서 기도를 한다. 밤이 되면 모스크 앞 광장은 거대한 포장마차촌으로 변한다. 온갖 나라 관광객들이 즉석 요리를 먹으며 마라케시의 밤을 즐긴다.

마라케시의 낮을 보내기 좋은 곳은 마조렐 정원(Jardin Majorelle)이다. 1917년 요양을 위해 모로코에 왔던 프랑스 화가 자크 마조렐이 만들었다. 마라케시에 아예 정착했던 마조렐은 땅을 사서 정원을 만들고, 자기가 좋아하는 파란색으로 정원을 꾸몄다. 1966년 정원에 들렀다가 그 파란색에 반했던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은 아예 1980년 정원을 구입해버렸다. 그때는 마조렐이 죽고 방치된 상태였다. 생 로랑은 2008년 죽어서 이 정원에 산골됐다. 정원에 들어가면, 붉은 도시에서, 새파란 ‘마조렐 블루’와 기기묘묘한 화초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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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즈 메디나에 숨어 있는 화려한 건물 ‘알 아타린 마드라사(Al-Attarine Madrasa). 859년 설립된 알 카라위인(University of al-Qarawiyyin) 대학교 기숙사다. 기숙사 건물은 1325년에 건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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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4: 경악할 아름다움, 페즈

페즈(Fez)에 가면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페즈 메디나는 미로다. 사람과 고양이가 어깨동무하며 걸어가면 막다른 골목이고, 뒤돌아보면 어느 골목에서 왔는지 정신을 잃는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대학교로 공인받은 알 카라위인(University of al-Qarawiyyin·859년 설립)이 뒷골목에 숨어 있다. 또 어떤 캄캄한 골목 끝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레스토랑도 숨어 있다. 알 카라위인 대학 기숙사는 정교하게 새긴 문양이 눈이 아플 정도다.

메디나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에 가죽 염색 공장이 있다. 혼자 간다면 냄새만 따라가면 된다. 고약하다. 공장에 도착하면 직원들이 박하 잎을 준다. 코를 막으라는 소리다. 2층 테라스에 올라가면 상상을 초월한 풍경이 펼쳐진다. 온갖 색깔 염색약을 풀어넣은 커다란 물통들이 셀 수 없이 놓여 있고 그 위를 노동자가 뛰어다니며 가죽을 물들인다. 소위 ‘이태리 명품 가방’용 가죽이 여기 페즈에서 수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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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우아라 가죽염색공장 골목에 그려진 튤립. ‘코로나를 잊지 말자’는 주민들 염원이 담겨 있다.


전 세계를 파멸시키려 했던 코로나 사태는 페즈 가죽염색 공장도 덮쳤다. 공장 가는 골목에 튤립이 예쁘게 그려져 있다. 하도 예뻐서 쳐다보는데, 앞집 아저씨가 한마디 한다. “이거, 코로나를 잊지 말자는 뜻이야. 그때 우리, 다 죽을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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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라바트에는 12세기에 짓다 만 모스크가 있다. 당시 무와히드 왕조 3대 지도자 야쿱 알 만수르가 만들던 중 사망하면서 미완으로 남았다. 멀리 보이는 탑 이름은 하산2세 탑이다. 1956년 모로코 독립을 주도한 국왕 무하마드 5세가 그 앞 성묘에 잠들어 있고, 경비병이 늘 묘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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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5: 잃어버린 힘과 영광, 라바트

라바트(Rabat)는 모로코 수도다. 마라케시에 도읍했던 무와히드 왕조 3대 지도자 야쿱 알 만수르가 여기로 천도하려 했지만 그가 죽으면서 무산됐다. 그때 만들던 모스크가 미완으로 남아 있다. 하산 탑이라고 부른다. 모스크 앞에는 1956년 독립을 쟁취한 무하마드 5세 무덤이 있다. 12세기에 만들어진 우다이아 성채(Kasbah of the Udayas)는 레콩키스타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 공세에 맞서는 요새로 사용됐다. 마을 하나가 요새 안에 들어가 있다. 그 규모와 성벽 두께를 보면 이 모로코인들이 이베리아를 점령할 수 있었던 힘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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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바트에 있는 12세기 우다이아 왕조 성채. 모로코는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했던 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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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6: 하얀 도시 카사블랑카

많은 사람이 모로코 수도로 착각하는 카사블랑카(Casablanca)는 경제 중심 도시다. 아무것도 없던 베르베르인 마을 하나가 1755년 지진으로 파괴됐다. 그때 술탄인 무하마드 3세가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다르 알 바이다(Dar al-Baida)’, ‘하얀 도시’였다. 이후 포르투갈인들이 자기네 말로 카사 브랑카(Casa Branca), ‘하얀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스페인인들이 자기네 말로 ‘카사 블랑카’로 정착시켰다.

탕헤르처럼, 카사블랑카는 국제도시다. 2차 대전 연합국이 전쟁 회의를 벌인 곳도 이 도시였다. 그 전쟁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카사블랑카’는 사실 공항 장면 빼고는 이 도시에서 찍지 않았다. 몽땅 미국 LA 세트장에서 찍었다. 남녀 주인공이 만나는 ‘릭스 카페’도 세트장이다. 그런데 2004년 당시 모로코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이 오랜 고증 작업을 거쳐서 카사블랑카에 진짜 같은 가짜 릭스 카페를 만들어버렸다. 카페 문 앞에서 험프리 보가트 흉내를 내는 남자들, 잉그리드 버그먼 흉내를 내는 여자들 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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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블랑카에 있는 하산2세 모스크. 1993년에 건축된 웅장한 건물이다. 관광객도 출입 가능.


경제적으로 대성공한 카사블랑카를 처량하게 여긴 사람이 있다. 전 국왕 하산 2세다. ‘경제적 성공으로 자칫하면 잃을 수 있는 영성 회복을 위해’ 1993년 그가 지은 모스크가 카사블랑카에 있다. 이름은 하산 2세 모스크다. 관광객에게도 문이 열려 있다. 바깥에서는 그 규모에 압도당하고 들어가면 그 화려함에 압도당한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고 복잡한 만큼 매혹적인 나라, 모로코 이야기였다. 한 도시에서는 길을 잃고 한 도시에서는 그 강렬한 색채에 넋을 잃게 만드는 나라 이야기였다.

[박종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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