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문화 전쟁… 여성·소수인종이 K팝 강력 팬덤으로 성장
정치 보수화에 반발… BTS·기생충도 트럼프 1기 때 성공
역설이지만 민주당 패배한 지금이 K컬처엔 ‘특수’ 될 수도
일러스트=이철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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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세계인이 숨죽이고 지켜본 미국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복귀였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의 등대로서 미국이 아닌 문화적 보수주의, 외교적 고립주의, 경제적 민족주의의 미국을 만들겠다는 그의 공약에 많은 관찰자가 ‘트럼프 2.0’ 시대를 대비하느라 분주하다.
그런데 미국 인터넷에서는 많은 한국인의 눈길을 사로잡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미국의 젊은 여성들이 대선 결과에 좌절하며, 이제 한국 페미니즘의 ‘4B 운동’을 배워야 한다는 여론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4B(非) 운동은 성차별 구조에 보이콧하는 차원에서 남성과의 섹스, 연애, 결혼, 출산을 하지 않는다는 한국 페미니스트 진영의 구호였다. 4B 운동은 이전에도 영어권 인터넷에서 소개되며 알음알음 알려지고 있었고, 트럼프의 재선을 맞이하여 본격적으로 수면 위에 올라왔다. 이제는 유수의 외신도 한국 페미니즘이 미국에서 일으키는 돌풍을 다루는 중이다. 어떻게 한국의 문화 전쟁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미국에 이런 폭풍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
먼저 미국의 문화 전쟁 구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2010년대 이래로 미국 대중문화에서는 소수 인종과 성소수자의 비중이 점차 늘어나고, 페미니즘이 부정할 수 없는 문화적 합의로 자리 잡았다. 인구구조의 변화와 대학교육을 받은 진보적 젊은 세대의 강고한 신념인 정치적 올바름(PC)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자연히 젊은 남성층을 위주로 이에 반발하는 지적, 문화적 조류가 등장했다. 이 중 일부는 ‘대안 우파’라고 불리는 집단을 구성하며 2016년에 트럼프를 지지하는 온라인 여론을 적극적으로 퍼트렸다. 미국의 Z세대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젠더 갈등의 격랑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K팝으로 대표되는 한국 대중문화는 급진적 진보주의에 우호적인 소수 인종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K컬처는 한국 바깥에서는 명백히 여성들의 수요에 반응하며 진화해 나갔고, 성소수자 팬덤의 영향력도 컸고, 결정적으로 소수 인종인 아시아인 문화였다. 미국의 마이너리티 집단은 여전히 ‘마이너리티 콘텐츠’ 표지를 달 수밖에 없는 미국의 대중문화 콘텐츠보다, 아시아에서 주류 문화로서 확고히 자리 잡은 K컬처의 자신감에 훨씬 더 크게 이끌렸다. 그렇게 트럼프의 첫 임기 동안 미국에서 K컬처를 즐기는 인구 집단은 트럼프 행정부의 보수주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이들을 끌어들이며 계속해서 성장해 나갔다. 미국 K팝 팬덤은 계속 정치화되었고,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들은 바이든을 지지하고 트럼프의 선거 캠페인을 방해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인공지능 번역의 발전은 K팝 팬덤의 세계적 공론장인 X에서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려 지역을 뛰어넘는 소통을 가능하게 했다. 한국의 급진 페미니스트는 손쉽게 자신들의 선전을 영어로 게시했고, 미국 K팝 팬덤은 한국어를 모르더라도 한국 온라인의 문화 전쟁을 피상적이나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격렬한 성별 갈등을 겪은 한국 인터넷의 언어가 K컬처를 따라 미국으로 확산되는 길이 열렸다.
이런 과거를 고려했을 때, 트럼프가 복귀하며 미국에서 K컬처는 다시 성장의 모멘텀을 얻을 것 같다. 급진 세력이 정치적 패배를 마주했을 때, 정치보다는 문화에 집중하며 급진주의를 간직하는 일은 매우 흔하다. 현재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은 예상치 못한 대패에 혼란을 느끼고 있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의 입장을 누그러뜨릴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 자신들의 문화 운동에 계속해서 영감을 주는 바깥 세계, 그중에서도 문화적 네트워크가 탄탄히 갖춰져 있는 한국의 문화에 더욱 몰입할 개연성이 높다. 이미 2016년에 한 번 일어났던 일이다. 방탄소년단이 빌보드 뮤직 어워즈를 받은 2018년, 영화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2020년이 모두 트럼프 1기 집권기였던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정치권의 보수화 흐름에 대응하는 문화계의 진보화가 K컬처에 기회를 주었던 공식이 다시 작동한다면, 트럼프 2기 집권기도 마찬가지의 ‘특수’를 누릴 수 있는 시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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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대학원생·'K를 생각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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