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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광화문·뷰] 미국판 ‘강남 좌파’는 왜 박살 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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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밀어붙인 ‘깨시민’ 철학

반칙 우대하는 ‘부작용’ 낳아

트럼프 당선은 그 역작용

‘게으른 구호 정치’ 희생자는 약자

“도대체 왜, 어떻게 트럼프가...” 답을 알 리 없는 기자에게 주위에서 이런 걸 많이 물어온다. 영상 하나를 보고 의문이 조금 풀렸다. 지난 11월 5일 미 대선과 함께 치른 하원 선거의 후보 토론 장면이다.

내용은 이렇다. 한 동양인 ‘아줌마’가 투박한 발음으로 금발의 백인 여성을 맹공하고 있다. “나는 6년 반 기다려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남동생은 중국에서 13년째 대기 중이다. 불법 이민을 방치하는 건 내 동생처럼 법을 지키는 사람의 뺨을 때리는 행위다.” “그쪽 재산이 2000만~3000만달러(280억~420억원)라죠. 월마트에서 식료품 사본 적 있어요? 인플레가 뭔지 알아요?” 이런 댓글이 달렸다. ‘브로큰 영어로 캐비아 좌파를 박살 냈다.’ ‘아시안 얼굴에서 진짜 미국인을 봤다.’ ‘진짜 아시안 맘처럼 혼낸다.’

공화당 후보 릴리 탕 윌리엄스(60)는 100달러 들고 중국에서 미국으로 이민해 변호사로 성공했다. 비록 선거에는 졌지만, 12년 만에 지역구(뉴햄프셔 2선거구)에서 공화당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의 상대는 민주당 매기 굿랜더(38), 워싱턴 정치 명문가와 예일대 출신으로 남편은 바이든의 국가안보보좌관인 제이크 설리번. 우리로 치면, 베트남 이민자인 보수 변호사가 강남 좌파 장관 사모님을 토론으로 박살 낸 것이다.

2010년 이후 미국에서는 다양성(Diversity), 공정성(Equity), 포용성(Inclusion), 약칭 ‘DEI’라는 진보적 가치가 득세해왔다. 인종, 성별, 성정체성 등에 따른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아름다운 가치다. 그런데 이걸 무리하게 ‘법과 제재’로 통제하자 사회가 찢어지기 시작했다.

최근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가 정부효율부 장관에 내정된 일론 머스크를 향해 “일론, 제발 과학 기금에서 DEI를 빼달라”며 글을 썼다. 바이든 정부는 취업은 물론 과학 기금 배정에까지 ‘DEI 지수’를 반영하도록 했다. ‘연구 성과’ 외에 ‘연구자 다양성(소수인종, 여성 등)’이 주요 변수가 됐다. 법철학자까지 나서 “과학 기금의 무자비한 정치화”라고 반발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학교로 들어간 ‘다양성’법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가정을 파괴하는 법’으로 해석됐다. 캘리포니아 등 진보적인 주에서는 초등생도 교사와 상담해 연방정부 돈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을 수 있고, 학교는 이 ‘개인 정보’를 부모에게 알릴 수 없다.

이런 불만을 진보는 ‘기득권의 반발’이라 몰아붙였다. ‘깨시민(Woke)’ 유명인들이 나와 “민주당이 옳다”만 외쳤다.

“투표 제대로 했지?” “당연하지, 자기야(honey).” 지난 10월 나온 해리스 선거 광고는 트럼프 지지자인 백인 남편을 속이고 아내가 기표소에서 몰래 해리스를 찍는다는 줄거리다. 배우 줄리아 로버츠의 내레이션은 이렇다. “우리는 원하는 대로 투표할 수 있어요. 그 사실을 누구도 몰라요.” 광고는 트럼프 지지자를 수십 년 전 권위적 남성으로, 그들의 아내를 ‘장기판 졸’로 그렸다. 오만한 시선이다.

미국인들이 의심한 지는 오래됐다. 소수가 다수를 소외시키는 게 정의인가, 불법과 게으름이 ‘포용’의 대상이라면 성실하게 살 이유는 뭔가, 너의 다양성은 왜 나의 가치관만은 배제하는가. ‘고졸 백인 남성’뿐 아니라 미국 MZ마저 우클릭 성향이 강해졌다.

‘소수자는 옳고 다수는 틀렸다’ ‘강자는 악, 약자는 선’ ‘관행은 기득권의 산물’.... ‘게으른 깨시민 정치’는 떼법을 동원해 규칙을 바꿔놓고 그 여파(consequences)에는 눈감았다. 나태한 구호 정치는 반발을 부르고, 반발력은 흉포해 약자를 먼저 벤다. 이래서 ‘깨시민 정치’를 위선이라 부른다.

[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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