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28일 충남 보령 청라은행마을축제 때엔 노란 은행 잎이 가득했지만(왼쪽), 2024년 11월3일 청라은행마을축제 당일엔 이상 고온 때문에 은행 잎이 아직 물들지 않았다. 김문한 이장 제공, 정봉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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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0년 11월의 어느 날
국내 최대 은행나무 군락지인 충남 보령시 장현마을 주민들은 40여년간 이어온 ‘청라은행마을축제’를 올해부터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 2040년대 들어 단풍 시기가 11월 둘째 주까지 밀렸는데, 재작년부터는 은행잎이 타들어가는 ‘잎마름병’이 심해져 더 이상 축제를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김문한(86) 이장은 20여년 전 기사(2024년 11월21일치 ‘잃어버린 가을, 푸른 단풍축제’)를 기자에게 보여주며 “이때부터 예상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2012년부터 10월마다 열었던 축제인데, 이때 처음으로 11월로 연기했어요. 은행잎이 하도 물들지 않아서….”
2030년대 들어 10월 평균기온 17도(1991~2020년 평균 14.3도) 벽이 자주 허물어지며 축제는 11월에 정착했지만, 그래도 초록 잎이 샛노란 잎보다 많았다 .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는 바람에 미처 노랗게 물들지도 못한 초록 잎이 떨어져내리는 현상을 두고 “ ‘초 ’ 풍낙엽 ”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 노란 은행잎이 가득한 장관을 보기 어려워지면서 하루 수천명에 달하던 축제 방문객 수도 백명 단위로 쪼그라들었다 . 축제 기간을 정하지 않는 ‘게릴라 축제’로 전환해봤지만 방문객 감소는 막을 수 없었고, 2046년 축제 기간 중 내린 폭설은 ‘가을 축제’ 이미지에 치명타를 날렸다. 게다가 이젠 미관과 병충해를 이유로 은행나무들을 대거 베어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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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재직 시절부터 “21세기 중반 이후 설악산 이북 등 일부 고지대에서만 단풍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해온 이상돈 명예교수는 “단풍나무 멸종이 임박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한반도엔 사계절이 아닌 ‘건기와 우기’가 있다며, “우기(6~9월)가 지난 뒤 가뭄이 길어지고 고온까지 겹쳐 잎이 물들기 어려운 환경이 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단풍이 멸종 위기에 처한 이유로 “늦은 단풍으로 동면이 늦어질 때 발생하는 나무 스트레스가 병충해를 키운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풍, 벚꽃 등을 테마로 삼은 축제가 어려워지자 ‘자연 중심형 축제’를 ‘문화 체험형 행사’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 힘을 받게 됐다. 한양대 관광학부 재직 시절 ‘기후변화와 지역 축제 위기’를 연구해온 김남조 명예교수는 2040년께 봄꽃·단풍 시기를 맞추지 못해 지자체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 ‘게릴라 축제’를 제안했던 당사자다. 그는 “한해가 다르게 기후 환경과 적정 수종이 변하는 한반도 상황에서 자연에 의존적인 계절 축제 대신 기후와 상관없는 지역 문화·먹거리 중심의 체험형 축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라은행마을도 한옥체험 공간 조성, 단오제 부활 등을 대안으로 논의하고 있다.
다만 국내에 몇 안 남은 은행나무 군락지가 사라지는 것을 두고 환경단체들의 반발도 거세다. 최진우 서울환경연합 생태도시전문 위원은 “열매 냄새 때문에 도심에서 은행나무를 대거 베어낸 인간들이 축제 중단을 이유로 은행나무 군락지까지 훼손하려 한다. ‘살아있는 화석’인 은행나무가 사라진다면 인류 또한 무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옥기원 기자 ok@hani.co.kr
※2024년 11월 청라은행마을 취재 내용에 이상돈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김남조 한양대 관광학부 교수의 자문을 활용해 2050년 단풍 축제의 미래를 예측해본 ‘가상기사’입니다.
2024년 11월3일 청라은행마을축제 기간인데도 이상 고온 때문에 은행잎이 아직 물들지 않았다. 정봉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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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높은 가을 기온 때문에 단풍잎이 물들기 전에 타들어가는 현상이 급증했다. 옥기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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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21일
[현장] 잃어버린 가을, 푸른 단풍 축제
“축제 당일인데도 단풍이 절반밖에 물들지 않았네요. 이번 가을이 유독 따뜻하대서 축제를 일주일이나 더 늦췄는데….”
2024년 11월3일 충남 보령시 장현마을 ‘청라은행마을축제’ 마지막 날 만난 김문한(60) 이장의 표정은 어두웠다. 보통 10월 말 열리는 청라은행마을축제는 은행나무 군락지에서 자생한 1천여그루 노란 은행잎 덕분에 ‘사진 명소’로 입소문 타며 충남을 대표하는 가을 축제가 됐다 . 올해엔 처음으로 11월로 축제를 미뤘는데, 이날 김 이장이 멍하니 바라보는 100살 넘은 은행나무 수십그루는 입동이 가까워진 11월 초에도 노란 단풍 대신 푸르른 은행잎을 흩날리고 있었다.
주민들은 “올해 가을 날씨가 유독 이상했다”, “초록 은행잎으로 축제를 치른 적은 없었다” 입을 모았다. 단풍은 최저기온이 5도 이하로 떨어져야 물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축제 당일까지 충남지역은 최고기온 24도, 최저기온 13도까지 올라가는 등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운 가을이 이어졌다. 축제를 찾은 방문객들도 반팔을 입은 채 땀을 식히려 손부채질 하느라 바빴다.
주민들은 검붉게 타들어간 잎을 초록 잎만큼 우려했다. 2010년대 축제 기간에는 은행잎 색깔 비중이 노랑 80~90%, 초록 10~20% 정도였는데, 올해에는 노랑 50% 이상, 초록 30%, 검붉은 잎 20%라는 것이다. 김동학 국립수목원 연구사는 “10월까지 늦더위로 한계치 이상의 빛을 받아 잎이 물들기 전 타들어 간 현상”이라며 “동면 기간이 더 늦어지면 생육과 병충해 등에 취약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유독 작고 많은 은행 열매가 열린 것도 좋지 않은 징조다. 주민 김민구씨는 “80년대까지도 씨알 좋은 은행 열매를 팔아 자식 대학 보낸다고 해 ‘대학나무’라고 했다. 그런데 올해엔 팔기 어려운 작은 열매만 양껏 열려 축제 때 냄새만 풍기는 애물단지가 됐다”고 했다. 김 연구사는 “나무는 생육 환경이 좋지 않으면 생존을 위해 더 결실을 많이 맺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기후위기 속 생존을 위한 몸부림인 셈이다.
올해 은행잎 절반은 절정을 맞지 못한 채 시들어 떨어졌다. 주민들은 “노란 은행잎을 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 방문객들에 미안한 마음뿐”이라 했다. 김 이장은 “그간 기후변화를 직접 체감하진 못했는데, 올해 처음으로 기후변화 때문에 단풍 축제가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보령/글·사진 정봉비 기자 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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