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5 (금)

이슈 종교계 이모저모

선교사들이 미국으로 보낸 편지엔 조선인의 피가 묻어 있었다 [선교의 길]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국 개신교 선교 140주년 기념
미국 동부 선교의 길 순례 (下)


늦가을 우듬지가 장대하게 하늘로 뻗은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신학교는 한국과 연관이 깊다. ‘마펫 컬렉션’ 때문이다.

마펫이 누구인가? 사무엘 오스틴 마펫(1864~1939)은 ‘한국 장로교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초기 내한 선교사로, 그는 자신이 남기는 자료들이 후대에 끼칠 영향력과 가치까지도 일찍이 알아본 선구자적 인물이었다.

마펫은 종교사에도 영원히 기록될 숭고한 종교인이지만, 그가 생전에 남긴 일제 만행 자료는 현재까지도 소중하게 살아 숨쉰다. 프린스턴신학교에 보관된 ‘마펫 컬렉션’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의 생생한 증거물로 추앙받고 있어서다.

매일경제

프린스턴신학교의 중앙도서관인 데오도르 세드윅 라이트 도서관. 이곳엔 사무엘 오스틴 마펫의 ‘마펫 컬렉션’이 보관돼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지난달 29일 방문한 프린스턴신학교 데오도르 세드윅 라이트 도서관에는 5m에 달하는 두 개의 나무탁자 위에 마펫이 직접 쓴 보고서가 한가득이었다.

라이트 도서관은 인류의 지성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대 재직 시절 살았던 생가로부터 고작 200m 거리에 위치한 프린스턴신학교의 중앙도서관이다.

이곳엔 1919년 조선팔도의 3·1운동 직후를 담은 수많은 보고서가 마펫의 손길이 닿은 원본 그대로, 그리고 낱장마다 순번이 부여된 채로 차곡차곡 보존돼 있었다.

매일경제

사무엘 오스틴 마펫 선교사의 사진. 그가 남긴 마펫 컬렉션은 한국 독립운동사의 생생한 기록물이다.


‘수천 명의 한국인이 길가에 서 있고, 모든 사람들이 옷을 벗고 있었다. 일본 군인들 옆으로 피 묻은 상처와 총검이 보였다. (중략) 군중 속에서 신학새들이 잔혹하게 구타를 당했다.’(1919년 3월 5일 마펫 선교사의 기록)

마펫은 1890년 1월 서울에 도착하며 선교를 시작했던 미국 북장로회 소속 해외선교사였다. 당시 그는 만 26세 젊은 나이였다.

서울을 거쳐 평양에 안착한 그는 평안도 지역에서만 8번의 전도여행을 떠나며 척박한 땅에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당시 신앙이 뿌리내리지 못했던 조선의 평양을 동양 최대의 선교부 결집지역으로 바꿔낸 결정적인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는 그 유명한 평양신학교 건립에도 공을 세웠는데, 그 과정에서 아내를 잃어 조선 땅에 안장하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매일경제

프린스턴신학교에 보관된 ‘마펫 컬렉션’ 자료들. 마펫 선교사는 자료의 가치를 일찍이 알아보고 한 점의 종이까지도 모두 소중히 보관한 뛰어난 수집가였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마펫 컬렉션은 ‘Korean Independence movement’라는 영문 이름의 3권짜리 묵직한 파일로 구성돼 있었다. 마펫이 일생 동안 모은 자료는 600박스로 추정된다.

마펫이 직접 쓴 컬렉션에는 “시위로 인해 신학교 개교가 연기됐으며, 기독교인에 대한 잔혹행위가 진행됐다”는 내용도 상세히 기록됐다.

특히 이승만 전 대통령도 이곳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이기에 마펫 컬렉션에는 당시 이승만 박사가 남긴 자료와 그에 대한 소개, 심지어 사망 당시의 신문기사까지도 원본으로 함께 보관돼 있다.

매일경제

·‘마펫 컬렉션’의 1919년 3월 5일 문서. 마펫 선교사가 직접 쓴 보고서로 3·1운동 직후의 일제 만행이 기록돼 있다. ‘일본 군인들 옆으로 피 묻은 상처와 총검이 보였다’는 문장도 생생히 남아 있다.


브라이언 섀틀러 프린스턴신학교 아카이브 담당자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국 선교에 공을 세운 마펫 보고서는 당시 혼란스러웠던 조선의 역사를 생생하게 일러준다”며 “당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마펫은 한국에서 보았던 이야기를 보고서로 작성에 미국에 보냈다”고 설명했다.

마펫은 1935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한 뒤 추방당한 인물이기도 했다. 따라서 마펫 컬렉션은 그런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기록물이다.

말년의 마펫 선교사는 중풍으로 쓰러졌고 건강 악화로 고향땅 미국으로 돌아간다. 소천 후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가족 묘지에 안장됐던 그는 한 세기가 지난 2006년 다시 한국을 찾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요청에 따라 서울 광진구 장로회신학대학교로 유해가 이장됐다. 장신대에는 지금 이 순간도 마펫의 동상은 그 험난했던 시절의 선교 역사를 말해준다.

매일경제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프린스턴대 재직 시절 거주행던 집. 프린스턴신학교에서 200m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다. 현재는 개인 소유의 집이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 선교 140주년을 맞아 반드시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장소는 볼티모어에 위치한 러블리 레인 연합감리교회다.

‘세계 감리교의 어머니교회(모교회)’로 불리는 곳으로, 모(母)교회란 쉽게 말해 ‘감리교가 비로소 여기서 부흥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교회는 한국과도 깊은 인연을 간직한다. 한국 개신교 선교의 절대적인 후원자였던 존 가우처(1845~1922) 선교사 때문이다.

가우처의 생을 이해하려면 그의 아내 메리 존 가우처 세실리아 피셔부터 기억해야 한다.

매일경제

볼티모어의 러블리 레인 연합감리교회 예배당 외부 전경. 이 교회는 ‘감리교의 어머니교회’로 불리는 감리교의 성지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가우처 부인은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였다.

평생의 동반자였던 두 사람은 해외 선교에 뜻이 깊었다. 이로 인해 가우처는 21년간 목회하면서 15개의 교회 예배당을 건축했다. 물질과 정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봉헌한 것이다. 가우처 부부는 중국 텐진에 병원을, 일본 도쿄에 대학을 설립했다.

둘의 후원은 아프리카, 중남미, 그리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까지도 뻗어나갔는데, 그들이 해외 선교에 사용한 액수는 당시 25만 달러를 넘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가우처 부부의 따뜻한 손길은 조선 땅에도 가닿았다. 1882년 조미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되고 1883년 민영익이 이끄는 보빙사(견미사찰단)가 미국에 파견된다. 보빙(報聘)이란 자국을 방문한 외교사절단에 대한 답례로 상대국을 방문하는 일을 말한다.

매일경제

볼티모어의 러블리 레인 연합감리교회 예배당 내부 모습. 이 교회는 ‘감리교의 어머니교회’로 불리는 감리교의 성지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시 가우처는 워싱턴 D.C.로 향하는 열차에서 보빙사 수행단장 민영익과 우연히 만나게 된다. 가우처는 그 자리에서 한국 선교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이후 한국 땅을 밟은 가우처는 연희전문학교, 이화학당 건축을 후원했다.

지난달 31일 방문한 러블리 레인 연합감리교회엔 가우처의 기록이 생생히 보관중이었다. 감리교의 역사는 1784년 시작됐고, 이 교회는 감리교 100주년을 맞아 1884년 새로 만들어진 건물인데, 가우처는 교회 개축 당시 담임목사였다.

천장에 푸른 은하수가 지나가는 하늘이 그려진 예배당의 유리창엔 감리교를 일으킨 목회자와 성도들의 이름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길게는 300년, 적어도 100년은 넘는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이다.

현지에서 사역중인 박대성 베나니한인연합감리교회 목사는 “가우처 목사는 아시아 선교 개척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는 아시아 선교 현장을 직접 방문해 지원하며 한국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평가했다.

매일경제

볼티모어의 러블리 레인 연합감리교회 예배당 내부 모습. 이 교회는 ‘감리교의 어머니교회’로 불리는 감리교의 성지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때 교인이 1000명에 달할 정도로 예배당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던 러블리 래인 연합감리교회는, 그곳이 ‘감리교 모교회’이자 성지라는 평가가 무색하게도, 현재 신도 수는 20~30명에 불과하다.

한때 모든 이들이 기둥처럼 붙들었던 예배당은 세상 속으로 흩어졌다.

이제 현대의 우리는 ‘종교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고심한다. 특히 팬데믹에 이어 인공지능(AI)의 발달이 눈앞에 벌어지면서 성직자, 예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신의 의미까지 고민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어도 한때 세상을 충만하게 만들었던 선의는 변질되지 않는다. 긴 여정에 동행한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는 “140년 전 한국을 사랑하여 개화의 문을 열게 하시고 선교사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 선교사들의 열정이 주는 메시지를 이 자리에서 고민하게 된다.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건 복음의 회고이자 자성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프린스턴·볼티모어 김유태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