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현지시각)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개막한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에서 의장인 무흐타르 바바예프 아제르바이잔 생태자연자원부 장관이 연설을 하고 있다. 바쿠/AF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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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필요한 ‘기후재원’에 돈을 댈 국가들을 새롭게 꼽는다면, 우리나라는 ‘공여국’이 되어야 할 정당성이 네 번째로 큰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일부 선진국들만이 공여국 지위를 지니고 있는 기후재원 관련 체제를 어떻게 확대할 것이냐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9)의 핵심 의제다.
11일 피터르 파우 네덜란드 아인트호벤공대 교수 연구팀이 올해 펴낸 ‘더 많은 나라들로부터 더 많은 기후 재원을?’ 제목의 논문을 보면, 현재 기후재원 공여국에 해당하지 않는 나라들 가운데 체코, 러시아, 폴란드에 이어 우리나라가 “공여국에 포함될 정당성을 충족하는 나라”로 꼽혔다. 유엔기후변화협약의 핵심인 ‘파리협정’은 “선진국(developed country)들은 ‘완화’와 ‘적응’을 위해 개발도상국(developing country)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제9조)고 규정하고, 그 의무를 ‘부속서 Ⅱ’에 명시된 24개국에 부과했다. 그러나 전체 재원과 공여국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제기됐고, 올해 총회에선 이를 합의하기 위한 ‘신규 기후재원 목표’(NCQG) 논의가 이뤄진다.
파우 교수 연구팀은 ‘부속서 Ⅱ’에 포함되지 않지만 새롭게 공여국이 될 만한 나라들이 어딘지 꼽아보기 위해 △국제협약 △책임과 역량 △국제기구 소속 △의지 등 4개 분야에서 각 나라들의 현황을 살폈다. ‘책임과 역량’에선 1990~2019년 이산화탄소 배출량(‘책임’)과 같은 시기 국민총소득(‘역량’)을 따졌다. ‘국제협약’에선 유엔기후변화협약·몬트리올 의정서·생명다양성 협약 등 다른 국제협약에서 어떤 지위에 있는지, ‘국제기구 소속’에선 유럽연합(EU)·주요20개국(G20)·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어느 국제기구에 속해 있는지 살폈다. ‘의지’에선 실제로 500만달러 이상의 개발기금을 공여하고 있는지 여부를 따졌다.
우리나라는 전체 13개 지표 가운데 8개에 해당했다. 여러 다른 ‘국제협약’들에서도 선진국 지위에 있지 않지만,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높아 책임이 컸고 국민총소득이 높아 책임을 다할 역량도 갖췄다. 주요20개국, 경제협력개발기구 등 잘 사는 나라들의 모임에도 들어 있고, 실제로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개발기금을 내고 있기도 했다. 이 결과는 우리나라가 기후재원 공여국이 되어야 할 정당성이 체코(9개), 러시아(9개), 폴란드(9개) 다음으로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튀르키예(7개), 에스토니아, 사우디아라비아, 슬로베니아, 멕시코, 중국(이상 6개) 등이 우리나라 뒤를 이었다. 한국과 함께 동유럽 국가들, 러시아, 모나코, 걸프만 국가들이 공여국이 되어야 할 정당성이 대체로 큰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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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르 파우 교수 연구팀의 논문에서 ‘기후재원’의 신규 공여국을 따져본 결과를 담은 그래픽. 출처 ‘카본 브리프’ 누리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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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파우 교수 연구팀은 유엔 기후변화협약에서 여태 이어온 협상이 “책임과 역량을 측정하는 방법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막다른 길에 다다랐다”고 지적했다. 선진국과 수혜국, 그리고 그 사이에 낀 개발도상국 사이의 입장 차이가 너무 커져서 “기후재원 마련을 위한 ‘공정한 분담금’에 합의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신 파우 교수 연구팀은 기후변화협약 참가국을 공여국과 수혜국 등 경직된 이분법으로 나누고 있는 현재 체제를 바꿔보자고 제안했다. “기후재원에 상징적·실질적으로 기여하면서도 그 수혜도 받을 수 있는” ‘중립 수혜국’(net recipients)이란 범주를 새로 도입하자는 주장이다. 이전에 없던 ‘중간 수준’을 새로 만들면, 더 많은 나라들을 참여시키면서도 각국의 책임과 역량을 다변화해 기후재원 마련의 현실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논리다.
다만 이런 접근이 현실적일 수 있을진 몰라도, 기후변화 논의의 고갱이인 ‘책임성’을 모호하게 할 것이라는 우려와 비판 역시 뒤따른다. ‘책임과 역량을 적당히 나눠 부담하자’는 것은 기후변화를 일으킨 핵심 당사자인 선진국들의 책임을 희석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파우 교수 연구팀 역시 “부속서 Ⅱ 국가와 그외 국가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상황을 문제로 지적했다. 신흥 경제국들이 아무리 정치적·경제적으로 발전했다지만, 기후변화에 가장 큰 책임을 지닌 “선진국의 기여가 모든 유형의 신규 기후재원 목표 관련 합의에서 중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영국의 비영리 기후연구단체 ‘카본 브리프’는 지난 4일 내놓은 분석에서 “총 배출량과 경제적 지위에 초점을 맞추면 일반적으로 중국, 인도, 러시아, 브라질을 포함한 대규모 신흥 경제국들이 신규 공여국이 되어야 하지만, 1인당, 특히 역사적으로 누적해온 배출량과 소득을 측정하면 기존 공여국들이 여전히 신흥 경제국들을 크게 앞지른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실제로 2017~2022년 1인당 국민총소득과 1인당 역사적 배출량을 보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부속서 Ⅱ 국가들이 여전히 신흥 경제국들을 앞지르는 것으로 나타난다. 영국의 싱크탱크인 ‘해외개발기구’(ODI)는 이를 근거로 들어, “중국이 기후재원 공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요구는 과학적 근거보다는 세계적인 강대국이자 금융국이라는 지정학적 근거에 기반을 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의 온실가스 배출량 추이. 출처 ‘카본 브리프’ 누리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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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가 보여주듯,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는 선진국은 아니지만 경제적 지위 등에 걸맞은 의무를 부담하라고 압박을 받는 위치에 있다. 선진국에게만 의무를 부과한 현재 유엔 기후변화협약의 틀을 뜯어고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중간 수준’의 범주를 새로 만드는 등 기후재원 공여국을 확대한다면 거기에 포함될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기후변화 관련 협상에서 논의의 향방을 신중하게 관망하는 한편, 우리나라가 비록 선진국 지위에 있지 않지만 각종 기금 등에서 선진국처럼 참여하는 등 이미 ‘자발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태도를 보인다. 정기용 외교부 기후변화대사는 지난 5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나라는 의무가 없는데도 의무 부담을 하는 모범적인 나라로, 우리처럼 개발도상국으로서 국제 기후재원을 내고 있는 나라가 없다”고 자평했다. 우리나라는 “녹색기후기금(GCF)에 6억달러를 이미 냈고, 지난해 출범한 ‘손실과피해기금’에도 최근 700만달러 공여를 약속했다”는 것이다. “글로벌녹색성장기구(GGGI)에는 매년 1000만달러 이상 내고 있으며, 공적개발원조(ODA)도 30.1% 증액했다”고도 밝혔다.
다만 강제하기 어려운 의무보다는 자발성을 앞세우는 이런 흐름은 기후재원 마련을 위해 달성해야 할 목표치가 모호해지는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2021년 유엔 기후변화협약 재정상임위원회(SFC)의 ‘필요성 결정 보고서’는 새로운 기후재원으로 2030년까지 6조달러(기존 목표치는 연간 1천억달러)가 필요하다고 분석한 바 있으나, 이번 총회에서 전체 목표치에 대해 명확한 합의가 이뤄질지는 불투명하다. 정 대사는 “그 규모는 (의무가 있는) 선진국이 잘 알 것”이라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처럼 “‘야심차지만 현실적인’(ambitious but realistic)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의무가 없기 때문에 얼만큼 낼지 밝히기 어렵고, 다만 “알아서 열심히 자발적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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