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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 (수)

“웨어 아 유 프롬?” [서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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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命人) |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하와이에서 열리는 국제 학술대회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나와 같은 장소에서 발표하는 연구자들이 궁금해서 학술대회 자료집을 찾아보았다. 미국, 캐나다, 필리핀, 한국, 헝가리…. 다양한 나라에서 온 발표자들이 있었다. 그중 한명은 소속이 하와이 대학교라고 쓰여 있었는데, 나는 그의 이름을 보고 당연히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다. 만나고 보니 역시 그의 피부색은 나와 비슷했다. 이국에서 서툰 영어로 논문을 발표하고 외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일에 많이 긴장하고 있던 나는 같은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의 이름과 외모에서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다.



발표가 끝나고 그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나는 당연히 그를 중국인으로 여기고 내 동서도 중국인이라면서 친근감을 표시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면서 자기는 중국어를 전혀 모르며, 한번도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번엔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하와이에서 태어나고 하와이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제야 나는 “아, 당신은 미국인이군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가 말했다. 자기는 미국령이 아니었던 하와이의 역사와 그 역사를 간직한 사람들을 매우 사랑한다고. 자기는 영어만큼 하와이어를 잘하는 자신이 자랑스러운 하와이 사람이라고. 나는 이내 얼굴이 빨개졌다. 그의 연구에서 흥미를 느낀 부분에 관한 이야기로 그에게 다가갈 수도 있었을 텐데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렇듯 차별은 차별하는 사람의 ‘의도’나 타인을 혐오하는 ‘말’에만 있지 않다. 내가 식당에서 음식을 갖다주는 노동자에게 “웨어 아 유 프롬?”이라고 묻고 그가 “방글라데시”라고 대답할 때, 내 의도는 단지 ‘나는 서울에서 온 고흥 사람인데, 당신은 어디에서 왔어요?’라는 의미였지만, 그 말엔 당신의 피부색은 나와 다르고, 당신은 한국 사람도 고흥 사람도 아니라는 ‘구별’이 들어 있다. 그때 그 노동자는 ‘우리’와 다른 타자다. 이때의 우리는 ‘순전한’ 한국인이고, 그는 ‘우리가 아닌’ 방글라데시인이 된다. 국적, 인종, 나이, 성별, 성적 지향, 신체적 특징 등이 어떻든 이 세상 누구도 단 하나의 정체성만으로 살아가지 않으며 특정 정체성만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진 않는다. 그런데 내가 하와이나 식당에서 만났던 사람에게 친근감을 표시할 때, 나는 그들을 단지 그의 피부색과 국적만으로 함부로 범주화하여 그 사람 자체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 안의 인종주의였다. 어쩌면 내가 중국인이라고 오인한 연구자에게 느꼈던 특별한 친근감의 실체는 발표장에 있던 백인들에 대한 열등감, 같은 동양인이라도 필리핀인에 대해서는 우월감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차별은 어떤 표현들과 행동이 혐오 표현이고 차별인지를 지적하고 규제하는 것만으로는 없어지지 않는다.



내 안의 인종주의를 들켰을 때, 나는 수치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 수치심은 내가 타인을 차별하는 사람일 리 없다는 어쭙잖은 자의식에서, 두려움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온다. 만일 나에게 수치심만 있었다면 나는 이런 순간을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만 있었다면 나는 낯선 타인들과 마주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차별 없는 사회를 위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수치심과 두려움 ‘사이’에 있다. 그 사이에서 멈칫거리며 타자를 바라보는 내 위치를 성찰하는 것, 하나같이 고유한 존재라서 저마다 다른 개개인을 특정한 범주에 따라 갈라치기 해서 유지되는 이 지배 구조를 직시하는 것, 그래서 내가 손잡아야 할 타인들에게 나를 개방하여 마침내 연결되고자 하는 용기를 내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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