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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 (수)

“일본 ‘잃어버린 30년’, 한국도 같은 실패 겪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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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데루오카 이츠코 사이타마대 명예교수가 5일 오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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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처음 방문합니다. 한국분들께 일본의 경제 상황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며칠이나 고민했습니다. 일본 경제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실패를 통해 한국인들이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경제가 여전히 ‘거품’의 달콤함에 취해 있던 1989년, 데루오카 이쓰코(96)라는 이름의 여성 경제학자(사이타마대 명예교수)가 내놓은 ‘풍요로움이란 무엇인가’(한국판 제목 ‘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라는 제목의 작은 책(이와나미서점 신서)이 일본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세계적 학자인 에즐라 보겔이 10년 전 내놓은 ‘재팬 애즈 넘버 원’(1979)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던 시대에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정반대의 얘기를 쏟아낸 것이다.



데루오카 명예교수는 이 책에서 “일본의 풍요로움이란 것은 실은 뿌리가 없는 사상누각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국가에 살고 있는 일본 시민들은 정작 전혀 ‘삶의 풍요로움’을 느끼지 못하며 사회에서 언제 배제당할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다는 문제의식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책은 77만부가 팔려나가는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일본 사회는 이 책이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는 데 실패하며 이후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리는 장기 불황에 빠지고 말았다. 데루오카 명예교수는 5일 서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진행된 ‘일본 경제’를 주제로 열린 특별강연에서 “한국도 요새 비슷한 문제에 빠져 있지 않으냐”라고 물었다.





1989년 출간 ‘풍요로움이란 무엇인가’서
‘거품 경제’ 지적해 일본사회에 충격
“한국도 요새 비슷한 문제에 빠진 듯”
일본의 실패 경험, 한국인과 공유하고
연대 가능성 찾기 위해 첫 방한·강연





1928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데루오카 명예교수는 일본의 전후 평화주의와 반성적 역사인식을 지탱했던 이른바 ‘전쟁을 경험한 세대’다.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배하던 시절을 살았던 사실상 ‘마지막 세대’이지만, 한국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반도 사람들에게 항상 미안했습니다. 우리가 예전에 저지른 일이 미안하고 너무 부끄러워서 한번도 올 생각을 못 했습니다.”



방문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4월 찾아왔다. 도쿄 신주쿠에서 지난해 숨진 농업경제학자 남편 슈죠(1924~2023)의 추도 모임이 열렸다. 이 자리에 그의 도쿄교육대 시절 제자 50여명이 참석했다. 그 가운데 서승 우석대 동아시아평화연구소장이 있었다. 데루오카 명예교수는 이 모임 이후 다시 만난 서 소장에게 “죽기 전에 한번 한국에 가보고 싶은데 안내해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실패한 일본의 경험을 한국인들과 공유하며 연대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였다.



데루오카 교수가 일본 사회에 ‘풍요로움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진 것은 1980년대 말 ‘거품 경제’가 꺼지기 직전이었다. 책을 내는데 큰 영감을 준 것은 1986~1987년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객원 교수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얻었던 경험이었다. 그가 관찰한 독일 사회에선 가난한 노동자도 넓은 집에 살고, 학비는 무료이며, 학생들은 교통비 할인 혜택을 받고 있었다. “결국 자본주의에도 여러 자본주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국민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자본주의가 있고, 사람들이 집도 살 수 없고, 하루 16~18시간씩 노동해야 하는 자본주의도 있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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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루오카 이츠코 사이타마대 명예교수가 5일 오후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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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우려대로 일본 경제의 위기가 찾아왔다. 거품이 터지며 일본을 대표하는 금융기관들이 줄줄이 망했다. 그와 동시에 세계화가 진행되며 '모노즈쿠리'(제조업)를 통해 세계를 제패했던 일본 주요 기업들이 고전하게 된다. 경쟁에 뒤처진 일본의 2000~2022년 경제성장률은 0.6%를 기록했다. 데루오카 명예교수가 책을 쓸 무렵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은 세계 2위였지만, 현재는 미국·중국·독일의 뒤를 잇는 세계 4위로 떨어졌다. 1인당 국민총생산은 24위까지 추락하고 만다.



잃어버린 30년을 극복하기 위해 2012년 말 등장한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아베노믹스’를 통해 양적 완화 정책을 편다. 그로 인해 일본의 국가부채는 국내총생산의 2.5배까지 늘어났다. 데루오카 교수는 “하지만 기대만큼 경제성장은 이뤄지지 않았고, 일본 경제는 앞으로 다가올 고인플레이션에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밖에 저출생·고령화와 잘못된 경쟁교육 등으로 인해 발생한 인재 고갈 문제 등 해법도 보이지 않아요. 앞뒤가 모두 꽉 막혀 있는 상황인 셈이죠.”





거대 정치 대신 개인간 소통에 희망
2010년부터 ‘주민 연구회’ 매달 진행
“‘내가 민주주의 주인공’ 인식 갖게 돼”





거대한 정치가 실패한 시점에서 아흔이 넘은 고령의 경제학자가 희망을 거는 주체는 사회를 실제 움직이는 ‘개인들'이다. 이를 위해 중요한 것은 ‘자신의 권리’를 소중히 여기는 개인들의 소통과 연대이다. 데루오카 명예교수가 지난 4월에 펴낸 새 책의 이름은 ‘승인을 열다’(承認をひらく·상대의 존재를 존중하고 인정하자는 의미)이다. “세상에 의견이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들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다른지 서로 대화하는 사회를 만들어야죠.”



이를 위한 ‘사회적 실험’으로 자신이 사는 도쿄 네리마구에서 2010년부터 ‘대화적 연구회’라는 모임을 진행 중이다. 주민들이 한달에 한번 모여 한 가지 주제로 세시간 반 정도 토론한다. 유명한 강사를 모셔오는 게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이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한 시간 정도 강연하고, 다 함께 2시간 반 정도 얘기를 나눈다. 이 신기하고 놀라운 모임은 벌써 150번 넘게 진행 중이다. 데루오카 교수는 이런 대화를 통해 사람들이 “내가 민주주의 주인공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며 “이런 작은 모임을 (지하철)역의 수만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젊은 세대들에게 세 가지를 당부했다. “첫번째로 저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입니다. 전쟁이란 것은 시작하면 멈출 수 없어요. 절대 시작되지 않도록 시민이 정치가에게 압력을 가해야 합니다. 둘째, 눈앞의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경제는 무엇을 위해 있는 건가요. 돈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잃지 않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일 간에 존재하는 역사문제에 대해선 “한국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나 징용공(강제동원 피해자) 문제에 대해 일본의 책임을 호되게 묻는 것에 대해 대찬성”이라면서 “그렇게 해야 일본이 앞으로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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