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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목)

[김준형의 '청맹과니'] 우리시대 역이기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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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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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진나라 말기, 진류현에는 나이가 60이 넘은 역이기라는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책읽기를 좋아했고, 뛰어난 능력과 큰 포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나 진류현의 사람들은 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집안이 가난했던 역이기는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를 했다. 성문을 드나드는 소위 '영웅'이란 자들을 눈여겨보면서, 자신이 의탁할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유방이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들은 역이기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유방을 만날 수 있었다. 유방을 만났을 때, 유방은 의자에 앉아 시녀에게 자신의 발을 씻기게 하고 있었다. 역이기는 '정의로운 마음으로 봉기를 하였다는 자가, 연장자를 이런 태도로 맞이하는가?'라며 호통을 쳤다. 유방은 역이기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깨닫고, 그를 상석에 앉혔다. 이후 역이기는 유방을 도와 진나라와 항우를 무찌르고, 한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역이기는 나이 60이 될 때까지도 능력을 인정받지 못 했지만, 다행히 유방을 만나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그렇지만 긴 역사 속에서, 넘칠 만큼 지혜를 가지고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능력을 썩혀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능력자들은 얼마나 많을까?

최근 흑백요리사라는 예능프로가 큰 화제가 되었다. 스타 셰프인 '백수저'들에게 재야의 고수 '흑수저'들이 도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흑수저들 중에는 학생들의 급식을 책임지시던 '급식대가', 중식당의 배달원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식당을 차린 '철가방', 만화책을 보고 요리를 배웠다는 '만찢남'과 같은 분들이 있었다. 모두 흔히 만날 수 있는 우리들의 이웃들이다. 비록 훌륭한 스승 밑에서 교육받은 분들은 아니지만, 생업에 종사하시면서 틈틈이 요리를 연구하셨지만, 그분들은 끊임없이 노력해 오셨다.

최고의 셰프 앞에서도 흑수저 요리사들은 당당했다. 가끔씩 흑수저 요리사가 승리할 때, 시청자들은 박수를 쳤다.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열심히만 살면,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다.'라는 희망을 보여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가슴이 뻥 뚫리게 만드는 카타르시스였다. 이 흑수저 요리사 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시대의 '역이기'인 것이다.

물론 맛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요소가 많은 분야다. 그래서 올림픽의 육상경기처럼 완전히 객관적인 판단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프로그램에서는 공정한 심사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출연한 요리사들도 최선을 다해서 기량을 발휘했다. 경쟁이란 것에는 승자와 패자가 생기기 마련이지만, 이런 경쟁에서는 승패가 중요하지 않다. 백수저 요리사이든, 흑수저 요리사이든 자신이 살아온 삶의 철학을 요리에 담아내려는 노력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다. 이 프로그램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청사진일 것이다. 경쟁의 기회, 공정한 심사,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주신 여러 요리사님들께 시청자 한 사람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우리 시대의 모든 분야의 '역이기'들에게도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희망이 있다.

김준형 / 칼럼니스트(우리마음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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