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시작으로 6선 의원 지내
이상득 前 국회부의장.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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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89) 전 국회부의장이 2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경북 영일 출신인 고인은 포항 동지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99년 미국 캠벨대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1년 코오롱 1기 공채 신입 사원으로 입사한 뒤 17년 만에 코오롱 대표, 코오롱상사 대표 등을 지냈다. 산업화 초기 전문경영인으로 섬유 산업의 기틀을 다지고 수출을 주도했다.
1988년 민주정의당 경북 영일·울릉 지역구 13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고 14대(민주자유당), 15대(신한국당), 16·17·18대(한나라당)까지 경북 포항남·울릉에서 연임했다. 의정 활동 중에 국회 운영위원장·재정경제위원장, 한일의원연맹회장, 한나라당 최고위원·원내총무·사무총장·정책위의장 등을 지냈고, 17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자원을 경영하라’는 책을 썼고, ‘국민훈장 동백장’과 ‘산업훈장 동탑훈장’을 받았다. 2011년 정계를 은퇴한 뒤 비리 혐의 등으로 두 차례 옥고를 치렀다.
의정 활동을 할 때는 주로 ‘미스터 위기 관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IMF 외환위기 직전이었던 1998년 여야 이견으로 국회에서 금융개혁법 통과가 어려워지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락을 받고선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으로서 연단에 서 “대한민국은 여러분의 나라도 아니고 김대중 당선인의 나라도 아닙니다. 국가가 위기입니다. 우리 모두의 나라입니다. 통과시켜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한 일화로 유명하다.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은 통화에서 “늘 국가가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정치가 국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2002년 한나라당 사무총장 재임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당 지지율이 급락하자, 소장파 의원들과 함께 박근혜 당시 당대표 영입을 주도했고 천막 당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2006년 국회부의장으로 미국을 방문해 전시작전권 조기 반환 문제점 등을 알렸으며,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와 박근혜 후보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당정을 하나로 모았다. 이명박 정권에서 주요 현안마다 막후 조율을 주도하며 ‘모든 게 형으로 통한다’는 의미의 ‘만사형통’ ‘상왕(上王)’으로 불리기도 했다.
2007년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위한 물밑 조율, 2010년 리비아 억류 요원 석방, 볼리비아 리튬 확보 등에도 관여했다. 국민의힘 김대식 의원은 “늘 뒤에서 묵묵히 국가와 국민을 위해 헌신하신 분이셨다”고 했다.
유족은 아내 최신자씨, 자녀 이지형·이성은·이지은씨, 며느리 조재희씨, 사위 구본천·오정석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발인은 26일 오전 6시 30분. (02)3010-2000.
[양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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