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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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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폼의 시대, 연극을 보는 이유는… “그곳에선 예술과 연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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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티아고 호드리게즈 인터뷰

“10명의 자원자가 필요합니다. 무대에 오른 관객 분들은 저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외울 겁니다.”

19일 서울 대학로극장 쿼드.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초청작 ‘바이 하트(By Heart)’의 연출가인 티아고 호드리게즈(47)의 말에, 200여 관객 중 10여 명이 성큼성큼 무대 위에 올랐다. 호드리게즈는 2022년부터 세계 최대 공연 예술 축제 중 하나인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으로 재임 중이다. 이 축제의 77년 역사상 첫 비(非)프랑스인 예술감독. 호드리게즈는 한국어로 외워(learn by heart) 온 셰익스피어 소네트 30번을 관객들에게 알려주며 함께 외워 나갔다.

조선일보

포르투갈 출신 작가·연출가 티아고 호드리게즈(가운데 선 사람)의 지난해 프랑스 아비뇽 '바이 하트' 공연 모습. 그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첫 비(非)프랑스인 예술감독이다. /아비뇽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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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트를 반복하는 중간중간 호드리게즈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93세에 시력을 잃게 될 거라는 진단을 받고 ‘외워서 마음으로 계속 읽을 수 있는 책’을 손자에게 부탁했던 자신의 할머니, 스탈린의 대숙청이 휩쓸던 소련에서 동료 작가 2000여 명과 함께 셰익스피어 소네트 30번을 외웠던 러시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 책이 금지된 세상을 그린 미국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1920~2012)의 SF소설 ‘화씨 451′…. 수많은 텍스트의 미로를 거쳐 도착한 이야기들의 끝에서, 무대 위와 객석의 관객 200여 명은 불의한 세상과 인간의 한계에 맞선 문학과 예술의 힘을 만났다. 그 상징인 셰익스피어 소네트 30번을 함께 다 외우게 된 건 덤이다.

공연 전인 16일 만난 호드리게즈는 “매 공연마다 10명의 관객 자원자가 오르지만, 말이 많거나 수줍어하거나 잘 외우지 못하는 등 다들 다양한 성격”이라며 “매번 예측 불가능성의 수조로 다이빙하는 기분”이라며 웃었다. “지난 10년간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등에 이어 이번에 한국어까지 300번 이상을 공연했지만 매 공연 첫 무대처럼 흥분되죠. 그게 인생이고, 라이브 공연의 매력 아닐까요.” 그는 “이렇게 다양한 문제가 생기는 것도 인간성(humanity)의 아름다움”이라며 “시를 혼자서 외우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지만, 함께 외우는 것은 눈이 먼다는 것, 닥쳐오는 죽음, 불의한 세상에 함께 맞서는 저항의 행위가 된다”고 했다.

2021년 서울 남산 국립극장에서 ‘소프루’(포르투갈어로 ‘숨, 호흡’을 의미)로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 포르투갈의 극장에서 수십년간 프롬프터(배우가 대사를 잊었을 때 속삭이듯 말해주는 사람)로 일한 사람의 회고담을 무대에 재현한 공연. 공연에 관한 공연,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는 그가 즐겨 탐구하는 주제다. 그는 “공연을 할 때 두 관객을 생각한다”고 했다. “13살 때 저는 극장을 싫어하는 소년이었어요. 지금 47살의 저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예술가죠. 이 두 관객이 모두 보고 싶고 즐길 수 있는 공연을 만들고 싶어요. 공연에 관한 공연을 좋아하는 건 그것이 관객에게 답이 아니라 질문을 주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틱톡과 숏폼이 대세인 시대여도, 극장에 모여 라이브로 공연을 지켜보는 경험의 본질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극장에 가려면 지하철을 타거나 어렵게 주차하고, 어쩌면 비를 맞아야 할지도 모르죠. 불편한 의자에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 앉아서 춥거나 더운 곳에서 2~3시간을 보내고요. 그런데도 우리는 왜 계속 극장에 갈까요? 그곳에 우리를 예술과 연결하는 심오하고 긴급한 무언가가 있기 때문 아닐까요?”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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