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
미국 31대 대통령(1929년 3월~1933년 3월) 허버트 후버 /AFPBBNews=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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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바이든 대통령 "트럼프는 허버트 후버 다음으로 많은 재정적자를 양산한 대통령" vs 트럼프 전 대통령 "내가 되고 싶지 않은 단 한 명의 대통령은 바로 허버트 후버다. 조 바이든은 우리 시대의 후버가 될 것"
이번 대선을 앞두고 90여년의 세월을 건너 소환되는 인물이 있다.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가 반면교사 삼는 미국 31대 대통령(1929년 3월~1933년 3월) 허버트 후버다. 대공황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며 '무능의 대명사'로 평가받는 후버는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기 전 그는 자수성가한 백만장자이자 구호활동가, 유능한 행정가로 이름을 날렸다.
후버는 1874년 아이오와주 한 마을에서 퀘이커 교도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6살 때 아버지를, 9살 때 어머니를 잃고 오리건주로 이동해 삼촌과 살았다. 사업가인 삼촌 밑에서 일을 배우며 야간 학교에서 공부한 그는 1891년 개교해 학비가 무료였던 스탠퍼드 대학교에 입학해 광산공학을 전공했다.
후버의 첫 직업은 광산 노동자였다. 대학을 졸업한 1890년대 초 경제 불황이 발생해 엔지니어 자리를 구하지 못한 탓이었다. 후버의 광산 노동자 동료들은 대학까지 졸업한 그를 질투하며 무시하고 따돌렸다. 후버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어려운 동료를 도우며 성실히 일했고 나중에는 동료의 인정을 받아 작업반장을 맡게 됐다. 그의 사연을 전해 들은 광산기업 본사 사장이 그를 정규직 엔지니어로 채용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46년 3월 허버트 후버 전 미국 대통령이 프랑스에 있는 초등학교를 방문해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AFPBBNews=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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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엔지니어로 승승장구한 후버는 남아공, 호주, 중국 등 세계를 돌면서 활약하며 30대에 백만장자가 됐다. 스탠퍼드 동기인 루 헨리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엔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있었다. 1900년 청나라(중국)에서 광산업 자문관으로 일하던 그는 톈진 의화단 운동에 휘말렸다. 그의 아내는 병원에서 환자를 돌봤고 후버는 방어벽을 치는 작업을 지휘했으며 목숨 걸고 청나라 아이들을 구하기도 했다.
광산 노동자 동료를 돕고, 청나라 아이들을 구한 그의 박애주의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때 더욱 빛을 발했다. 당시 영국 런던에 머물던 그는 벨기에 구조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돼 벨기에와 북부 프랑스에 식량 분배 임무를 맡았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후버를 미국 식량청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미국의 식량 생산을 촉진하고 분배하는 일을 해내는 동시에 연합국 국민들이 굶주리지 않도록 조치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다시 유럽으로 가서 사비를 털어 구호 활동에 매진했다. 그는 구호 활동으로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위대한 인도주의자'라고 칭송받았다.
1920년 정권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넘어갔음에도 워런 하딩 행정부는 후버를 상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상무장관으로서 후버는 세인트로렌스 해로를 개척하고 당시 최대 규모 댐 공사인 볼더 댐 공사를 지정하는 등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 볼더 댐은 1947년 후버 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캘빈 쿨리지 행정부에서도 장관 자리를 지켰다. 1928년 자타공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그는 민주당 후보 앨 스미스를 가볍게 이겼다.
1929년 2월11일 허버트 후버 당시 미국 대통령(왼쪽)이 토마스 에디슨(오른쪽 두번째)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한 모습. 포드 컴퍼니 창립자 헨리 포드(왼쪽 두번째)와 파이어스톤 타이어 창립자 하비 파이어스톤(오른쪽 끝)도 함께 서있다. /AFPBBNews=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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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3월 후버가 취임할 당시 미국은 기대감에 가득 찬 분위기였다. 후버도 경제 성장과 함께 개혁 정책 성공을 약속하며 자신감을 보였다. 취임 초기에는 국경분쟁 중이던 페루와 칠레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는 업적도 남겼다. 그러나 몇 달 뒤 주식시장이 폭락했고 미국 경제는 나락으로 빠졌다. 1929년 경제 공황이 후버의 잘못은 아니었다. 이전 행정부들 시절부터 수십 년 동안 쌓여온 '시장의 실패'가 한 번에 터져 나온 결과였다.
후버의 잘못은 사태의 심각성을 경시했다는 점이었다. 개인은 물론 기업과 은행이 파산하는 판국에서도 후버는 "미국 경제는 근본적으로 튼튼하다"며 "불경기는 2개월이면 끝날 것"이라는 말만 늘어놨다. 하지만 경제 상황은 계속 악화했고 그해 12월 100만명을 넘어선 실업자 수는 임기 3년째가 된 1932년에는 1300만명을 돌파했다. 당시 실업자들이 모인 판자촌에는 '후버 마을'(후버 빌)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와중에 1929년 '보너스 군대'(Bonus Army) 사건이 터지며 후버의 평판은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경제 대공황으로 불안해진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은 1945년 지급 예정이던 군인연금 보너스를 미리 달라는 농성을 벌였다. 재선을 노리던 후버 대통령은 시위대를 강하게 진압했고 이 여파로 시위대에서 5명 넘는 사망자 1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나왔다. 후버 정부는 언론을 이용해 시위대를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후버는 땅에 떨어진 위신을 되찾기 위해 뒤늦게 여러 경제 조처를 했다. 기업 지원을 위해 재건금융공사를 세우고 일자리 제공을 위해 공공근로사업을 확대했다. 이때의 조치를 두고는 경제학자 사이에선 '상황을 악화시켰다', '다음 정부에서 빛을 봤다' 등 평가가 나뉜다. 대공황을 수습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경기는 계속 악화했고 결국 후버는 1932년 대선에서 패배했다.
후버는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뒤 오히려 행정가로서 활약을 이어갔다. 그는 1947년 해리 트루먼 정부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전쟁물자 수급계획을 조직하는 일을 맡아 38개국을 돌며 역할을 수행했다. 트루먼 정부 정부 부처 재정비를 위해 발족한 특별위원회의 위원장으로도 활동했다. 1953년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비슷한 임무를 수행했다. 계속 공직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1964년 90세 나이에 사망했다.
이영민 기자 letswi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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