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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목)

이슈 미술의 세계

노벨상 받은 후 한강이 쓴 첫 글… 900자에 외할머니 추억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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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한강의 아버지인 소설가 한승원은 지난 11일 전남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의 '한승원 문학 학교'에서 회견을 열고 "한강에게 노벨문학상을 준 것은 한림원 심사위원들이 '사고를 친 것'"이라 웃으며 한강의 어린 시절 가족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은 모녀의 모습.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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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53)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첫 글이 공개됐다. 900자 정도의 짧은 분량으로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와의 아련한 추억을 담았다.

한강의 새 글은 15일 밤 발행된 온라인 무크지(비정기간행물) ‘보풀’ 3호에 실렸다. 그가 연재 중인 코너 ‘보풀 사전’을 통해 공개됐으며 ‘깃털’이라는 제목의 짧은 산문이다.

글은 “문득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 외할머니가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은 당신의 외동딸(한강의 어머니)을 향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며, 외할머니와 함께한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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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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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이 실린 ‘보풀’은 한강과 음악가 이햇빛, 사진작가 전명은, 전시기획자 최희승 등이 모여 만들었다. 구독하면 작가의 글이나 글과 연계된 사진·미술작품·음악 등을 이메일로 전송받아 누구나 감상할 수 있다.

‘보풀’ 공식 인스타그램에는 한강의 사진과 함께 “보푸라기 동인 한강은 소설을 쓴다. 가볍고 부드러운 것들에 이끌려 작은 잡지 ‘보풀’을 상상하게 되었다”는 소개문이 적혀 있다.

창간호는 지난 8월 공개됐다. 한강은 여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풀의 모습은 팔꿈치 언저리에 마치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동그라미다,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오라기로 이어져 마치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연결되어 있다, 후, 불면 흔들리지만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그런 것들의 목록을 이곳에 모아보려고 한다”고 썼다.

다음은 3호에 실린 한강의 ‘깃털’ 전문이다.

◆ ‘깃털’

문득 외할머니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다. 사랑이 담긴 눈으로 지그시 내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손을 뻗어 등을 토닥이는 순간. 그 사랑이 사실은 당신의 외동딸을 향한 것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등을 토닥인 다음엔 언제나 반복해 말씀하셨으니까. 엄마를 정말 닮았구나. 눈이 영락없이 똑같다.

외갓집의 부엌 안쪽에는 널찍하고 어둑한 창고 방이 있었는데, 어린 내가 방학 때 내려가면 외할머니는 내 손을 붙잡고 제일 먼저 그 방으로 가셨다. 찬장 서랍을 열고 유과나 약과를 꺼내 쥐어주며 말씀하셨다. 어서 먹어라. 내가 한입 베어무는 즉시 할머니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 기쁨과 할머니의 웃음 사이에 무슨 전선이 연결돼 불이 켜지는 것처럼.

외할머니에게는 자식이 둘뿐이었다. 큰아들이 태어난 뒤 막내딸을 얻기까지 십이 년에 걸쳐 세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늦게 얻은 막내딸의 둘째 아이인 나에게, 외할머니는 처음부터 흰 새의 깃털 같은 머리칼을 가진 분이었다.

그 깃털 같은 머리칼을 동그랗게 틀어올려 은비녀를 꽂은 사람. 반들반들한 주목 지팡이를 짚고 굽은 허리로 천천히 걷는 사람. 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혼자 외가로 내려가 며칠 머물다 올라오던 아침, 발톱을 깎아드리자 할머니는 ‘하나도 안 아프게 깎는다…(네 엄마가) 잘 키웠다’고 중얼거리며 내 머리를 쓸었다. 헤어질 때면 언제나 했던 인삿말을 그날도 하셨다. 아프지 마라. 엄마 말 잘 듣고. 그해 10월 부고를 듣고 외가에 내려간 밤, 먼저 내려와 있던 엄마는 나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 얼굴 볼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잡고 병풍 뒤로 가 고요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유난히 흰 깃털을 가진 새를 볼 때, 스위치를 켠 것 같이 심장 속 어둑한 방에 불이 들어올 때가 있다.

[문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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