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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월)

너의 항해를 응원하며 [서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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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다큐멘터리 ‘일과 날’(Works and days)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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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후배가 회사를 그만뒀다. 이 회사에서 만난 첫 후배였다. 후배의 마지막 출근일엔 9월 말까지 끈질기게 덥던 날씨가 마법처럼 선선해졌다. 새로운 계절이 열린 것 같았다.



들고 나는 사람이 적은 조직의 특성상, 후배의 결정을 두고 사람들은 웅성댔다. 후배는 방송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일을 찾고 싶어서 떠나기로 했다. 후배를 향한 많은 질문과 의견이 오갔고, 거기엔 여러 갈래의 감정들이 있었다. 후련하고 담담하게 답하는 후배를 보며, 좋은 작별이란 어떤 걸까 생각했다.



후배가 입사한 해 시월엔 함께 부산국제영화제에 갔다. 영화제 분위기를 흠뻑 느끼진 못했다. 둘 다 일이 바빠 ‘성덕’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 한편을 같이 본 게 다였다. 오세연 감독의 ‘성덕’은 어느 날 갑자기 범죄자가 된 스타의 팬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렇게 웃기고 슬픈 다큐멘터리는 처음이라고, 감독의 재능과 유머 감각이 너무나 부럽다며 감상을 나눴다. 이야기가 즐거워서 일부러 수영강변을 돌며 느리게 걸었다.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동료를 만나 기뻤다. 내년에도 영화제에 함께 오자고 했는데,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일이 바빠 그러지 못했다. 일에 쫓기느라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버렸다.



후배가 회사를 떠난 뒤,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렸다. 혼자서 ‘일과 날’(Works and days)라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영화엔 평범한 사람 아홉명이 등장한다. 그들은 각자 오래된 전파사, 아이들을 키우는 집, 염전, 마네킹 공장, 양조장, 영어학원, 촬영 현장, 재활용 공장, 백반 식당에서 일한다. 고정된 카메라 구도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꼭 그림처럼 보인다. 아침이면 일어나 밥을 먹고 하루치 일을 하고 쉬다 잠드는 각자의 일상이 교차되며 이어진다.



영화의 내레이션은 주인공들이 직접 한다. 서투르지만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시처럼 들린다. 일과 삶에 관한 그들의 생각과 감정이 시구처럼 느리고 묵직하게 마음을 울린다.



이들은 쉬거나 잠들기 전,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으로 암울한 미래에 관한 뉴스를 본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고, 앞으로의 세상은 얼마나 비관적일지 알 수 없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대로 불안하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는 보통 사람에겐 별수가 없다. 그저 매일 일어나 하루치 일을 하며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보통의 삶에 녹아 있는 건 무력(無力)이 아닌 존엄이다. 내게 주어진 몫의 일을 성실히 해내는, 오늘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나아가는 삶의 존엄 앞에 겸허해진다.



배경음악도, 카메라 움직임도, 극적인 전개도 없지만 깊이 몰입하게 되는 이 영화의 막바지엔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의 기도는 용기에 관한 것이다. 인생에서 겪게 될 크고 작은 역경 속에서도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 담담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꼭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이를 위한 기도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탄 버스 창문 너머로 수영강이 보였다. 삼년 전 시월에 후배와 함께 봤던 야경이었다. 문득 좋은 작별이라는 건 영화 속 기도를 서로에게 전하는 일 같은 거 아닐까 싶었다. 전혀 다른 풍경 속으로 떠나는 네가 어떤 날에도 너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 운이 좋다면 다시 만나 동료가 될 수도 있지만, 보통은 각자 사느라 바빠 소원해질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망망대해 저편에서 누군가 제 몫의 항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덜 외로워지기도 하니까.



후배가 떠나고 나는 남았다. 허전해진 마음으로 해야 할 일을 한다. 멀리서 새로운 항해를 시작할 후배가 그 애답게 헤엄치길 바라며. 나 또한 그러겠다고 다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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