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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 (일)

고종의 폭주 속 ‘러-일 알력’ 본격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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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폭주를 보며 모두가 절망했다. “왕(고종)은 1년 동안 조선 정부를 완전히 통치했지만, 결국 자치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만 입증했을 뿐이오.” 일본은 조선을 자국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지역이라 생각했지만, 러시아는 일본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지하려 했던 러시아가 미덥게 보이지 않아 멈칫하는 사이, 일본이 차곡차곡 영향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한겨레

1897년 10월12일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등극한 고종은 이튿날 각국 사신들에게 “상하 신민들의 청을 억지하기 어려워 황제라는 위호를 쓰게 됐다”고 설명했다. 황태자 순종(오른쪽)과 대원수 예복을 입고 함께 찍은 이 사진은 1900년 4월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국가유산청 제공


“아라사(러시아)에 갔던 공사 민영환씨가 여러달 만에 본국에 돌아왔으니 반갑게 치하하자. (중략) 공사가 아라사 정부의 허락을 받아 육군 교사를 얻어오는데 정령(영관급 장교)이 하나요 위관이 둘이요 군의가 하나요 하사관이 열이라.”



‘조선을 보호해 달라’는 고종의 요청을 전하러 러시아에 갔던 민영환 일행이 귀국한 것은 1896년 10월20일이었다. 러시아는 보호국 요청은 거절했지만, 내부 검토 끝에 조선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드미트리 푸차타(1855~1915) 대령 등 총 14명의 군사 교관단을 조선에 파견했다. 이 소식을 전하는 ‘독립신문’ 건양 원년(1896년) 10월24일치 기사를 보면, 조선이 “튼튼한 군사”를 갖춰 “자주 독립”하기 바라는 간절한 기대감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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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육군 내 극동전문가로 통하던 드미트리 푸차타 대령은 1896년 10월20일 조선에 도착해 을미사변·아관파천으로 무너진 조선군을 재건하는 훈련을 시행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푸차타는 도착 직후 조선군 800명에 대한 훈련을 시작했다. 동시에 조선의 대신들과 함께 을미사변·아관파천 등으로 사실상 붕괴된 조선군을 재건하기 위한 계획을 짠다. 그 결과 12월2일 조선에 6000명 규모의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 러시아로부터 29명의 장교와 131명의 하사관을 파견받는다는 이른바 ‘푸차타안’이 도출됐다.



일본은 이 무렵 을미사변 이후 악화한 조선의 민심 동향에 큰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하라 게이(1856~1912) 주조선 일본 공사는 8월19일 전문에서 “관민 일반은 물론 재류 외국인에 이르기까지 배일의 풍조가 매우 성하여 우리의 행위가 무엇이 되든 모두 반대를 시도하는 정황”이라며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를 만회하지 않는다면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이 날로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군사교관의 손에 조선군이 양성된다면, 지난 6월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로 겨우 맞춰둔 러·일의 전략적 균형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라의 후임인 가토 마스오(1853~1922)는 10월31일 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에게 푸차타 군사고문단의 등장은 “러시아 세력이 발판을 얻게 되는 것이므로 상당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보고했고, 11월18일엔 “하루라도 속히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고종의) 환궁을 실행시켜야 한다”고 조바심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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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10월8일 을미사변으로 숨진 명성황후의 장례식이 치러진 것은 2년 뒤인 1897년 11월21~22일이었다. 당시 모습을 담은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러시아식 군복을 입은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국가유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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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내정으로 눈을 돌리면 갑오개혁이 실패한 뒤 나라 꼴은 다시 엉망으로 변해 있었다. 이 무렵 조선의 권력은 박정양·이완용·이범진 등 ‘정동파’라 불리던 친러·친미 성향의 개화파를 중심으로 ‘안동 김씨’인 김병시(1832~1898)로 대표되는 전통적 보수파, 고종에게 맹목적 충성을 다하는 이용익 등 측근 그룹, 러시아어가 가능한 김홍륙(?~1898) 등 ‘통역 권력’ 등에게 분산돼 있었다. 특히 러시아어 통역인 ‘듣보잡’ 김홍륙의 전횡에 치를 떠는 이들이 많았다.



이 무렵 조선이 달성해야 할 시대적 과제는 여전히 근대 국가에 적합한 통치 체제를 확립하는 정치 개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종의 자의적인 군주권 행사를 강하게 억누르려 했던 김홍집·유길준의 실패를 통해 깨닫게 된 교훈은 고종의 협력 없이는 그 어떤 정치 개혁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었다. 김홍집 등 갑오개혁 주도 세력과 지향하는 바가 거의 같았던 ‘정동파’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현의 박사학위 논문 ‘독립협회 국가개혁사상의 민주적 전회에 관한 연구-군권의 제도화를 중심으로’(연세대, 2018)에 따르면, 이 고민을 반영한 ‘절충안’이 이른바 의정부 관제였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 일곱달이 지난 뒤인 1896년 9월24일 조칙을 내려 “지난날 난역(亂逆)의 무리가 국가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정치 제도를 변경하여 심지어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칭”했다며 이제부터 내각을 폐하고 의정부로 물린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새 의정부 관제는 “대군주 폐하가 만기를 통솔한다”고 분명히 못 박으면서도 갑오개혁 때 내각과 비슷한 기능을 갖춘 의정부가 국가의 실제 의사결정을 담당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 역시 고종이 자신의 군주권을 제한하기로 동의할 때만 기능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고종이 그린 국가의 미래는 황제권 강화를 통한 국가 개혁이었다. 자신을 제약하는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1차로 택한 수법은 갑오개혁 때 ‘왕실 사무’와 ‘정부 사무’를 엄격히 분리하기 위해 만든 ‘궁내부’의 덩치를 키우는 것이었다. 가장 민감한 것은 역시 돈(세금) 문제였다. 궁내부는 1896년 5월부터 칙명을 내세워 잡세를 걷기 시작한다. 세금 징수는 갑오개혁 때 탁지부 업무로 일원화됐지만, 이를 무시한 것이다. 하라는 1896년 8월15일 전문에서 “궁정의 비용이 부족하다는 구실로 삼아 궁내부에서 여러 잡세를 징수하고 있다. 그 세소의 수가 70여개로 늘어나” 일본과도 마찰을 빚고 있다고 전했다. 돈이 필요했던 것은 명성왕후의 제사(삭망제)와 장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였다. 이 무렵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을 보면, 고종이 1897년 8월 궁내부 경비 가운데 1만여원을 절에 공양료로 선불해 관리들의 월급을 주지 못했다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고종의 폭주를 보며 모두가 절망했다. 윤치호는 해를 넘긴 1897년 2월7일치 영문일기에 아관파천 이후 고종이 행한 지난 1년 동안의 통치를 보며 절망한 미국인 법률 고문 클래런스 그레이트하우스의 푸념을 길게 적었다. “윤, 당신도 알다시피 조선 정세가 가장 암울할 때에도 나는 낙관적이었소. 지금은 모두 희망을 잃었소. 왕(고종)은 1년 동안 조선 정부를 완전히 통치했지만, 결국 자치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만 입증했을 뿐이오. 단언컨대 앞으로 늦어도 2년 안에 모든 것이 파탄 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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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1897년 10월12일 환구단에서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행한 뒤 황제로 올랐다. 환구단은 천자의 나라가 된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시설이었다. 이 사진은 1907년에 촬영된 것이다. 국가유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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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8월14일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로 바꾼 뒤 10월12일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며 황제가 됐다. 한달 뒤인 11월21~22일엔 많은 돈을 들여 준비해왔던 명성왕후의 장례가 열렸다. 각국 공사들이 오전 5시 반부터 참석한 가운데 오전 7시 관을 실은 큰 상여를 짊어진 200명의 무리와 장례 행렬이 경운궁을 출발해 오후 2시 청량리 홍릉에 도착했다. 이 행사에서 눈길을 끈 것은 단연 러시아의 존재감이었다. 의장병은 모두 러시아식으로 변해 있었고, 가마 네 귀퉁이에서 고종을 호위한 것은 각각 네명의 러시아 하사관이었다.



이런 ‘러시아 우위'의 구도를 흔들려는 일본의 반격은 1897년 2월께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첫 카드는 아관파천 직후 러·일이 맺은 ‘타협안’인 베베르-고무라 각서(1896년 5월14일)와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6월9일)를 공개한 것이었다. 일본은 2월26일 러시아의 동의를 거쳐 이 문서를 공개했다. 훗날 ‘매국노’가 되는 이완용(1858~1926) 외부대신은 앞에선 조선을 보호하는 척하며 뒤에선 일본과 타협한 러시아의 ‘이중성’에 큰 충격을 받았다. 러·일 양국에 보내는 3월9일치 회신에서 “우리 정부는 두 문서 체결에 동의한 적이 없다”며 이는 “우리의 자주행사권을 결코 구속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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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외부대신 이완용은 조선이 살아남으려면 “어느 강국에 의뢰하여 러시아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선택한 어느 강국은 일본이 된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 무렵 이완용의 정세 인식을 보여주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주한일본공사관기록 9권(1896년 12월22일 ‘안경수와의 담화내용 보고’)에 남아 있다. 러시아의 모호한 대한반도 정책에 대한 조선 내 불신감이 깊어져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조석으로 두려움에 견디지 못하는 것이 바로 러시아의 동향이다. 듣자 하니 러시아 내 의견이 두 파로 갈라져 갑(甲)파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는 게 러시아 본뜻이 아니라 하고, 이에 반대하는 을(乙)파는 이 절호의 시기를 만나 병제·경제는 물론 정략상에 이익이 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어 러시아의 세력을 공고히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다. 우리가 각성해 신속히 이를 방지하지 않으면 훗날 후회한들 어쩔 수 없는 뉘우침만 있을 것이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극한 혼란 속에서 4월 말 조선 군부 내에서 은밀히 논의돼 오던 푸차타안이 공개된다. 심상훈 군부대신과 민영기 군부협판 등은 21일 밤 러시아 장교와 하사관 등 160명을 초빙한다는 푸차타안을 시행하기 위한 조약서 3통을 만들어 이완용에게 날인을 요구했다. 이완용은 “그렇게 많은 외국인 장교를 초빙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더해 가토의 집요한 방해 공작이 이어진다. 일본은 조선을 자국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지역이라 생각했지만, 러시아는 일본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생각뿐이었다. 의지하려 했던 러시아가 미덥게 보이지 않아 멈칫하는 사이, 일본이 차곡차곡 영향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고종의 대러 접근을 상징하던 푸차타안 역시 크게 축소된 채 시행된다.



한반도를 둘러싼 러·일 알력이 다시 고개를 드는 가운데 조선의 운명을 가르게 되는 두가지 중대 사건이 발생했다. 첫째는 러시아의 뤼순·다롄 점령, 둘째는 러시아의 세력 확대를 반대하는 독립협회의 저항운동이었다. 이 두 사건이 맞물리며 아슬아슬하던 러·일 간 힘의 균형이 깨지게 된다. 이는 대한제국에 너무나 큰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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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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