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 윤석열’의 롤모델은 트럼프고, 플레이북은 트럼프 베끼기다.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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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돌리긴 했으나 조짐이 안 좋다. 계엄으로 인한 내란 위기를 탄핵으로 일단 수습하기는 했으나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의 대응과 국민의힘이 보여주는 정치 행태 때문이다. 한마디로 기괴하다(weird). 헌법재판소에서의 탄핵 인용 뒤 고개를 숙였던 박근혜 대통령과 달리 윤 대통령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끝까지 싸우겠다”며 결사항전을 외치고 있다. ‘전사 윤석열’의 롤모델은 트럼프고, 플레이북은 트럼프 베끼기다.
2020년 트럼프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와중에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낸 마이클 플린이 우파 언론 뉴스맥스와 인터뷰에서 “계엄령 선포하고 트럼프가 패배한 것으로 나타난 4개 경합주(스윙 스테이트)에서 선거를 새로 치르자”고 제안했다. 트럼프도 이 아이디어를 놓고 참모들과 깊이 검토해봤으나 결국 접었다. 대신 실행한 안이 지지자들을 동원해 의회의 대선 결과 승인을 저지하는, 즉 의회 폭동이었다.
윤 대통령도 선거 결과를 부정했다. 계엄령 선포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군인을 보낸 이유에는 부정선거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는 지난 22대 총선에서의 대패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선관위 서버를 확인하면 부정선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잘못된 믿음에 따른 선택에서 윤 대통령은 트럼프와 달리 계엄령을 선택했다. 감히 트럼프도 포기한 계엄령을 발동할 정도로 윤 대통령의 정치 지능은 한심했다.
윤 대통령과 트럼프는 닮은 점이 참 많다. 그들은 집권 기반이 취약한데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2016년 대선 때 트럼프는 비록 선거인단 확보에서 이겨 승리했지만 일반투표에서는 졌다. 그럼에도 그는 초당적 협력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시종일관 야당인 민주당을 공격하고, 조롱하고, 비난했다. 심지어 같은 당 소속 의원들조차 자신과 다른 언행을 하면 공격했다. 윤 대통령도 그랬다. 24만여표 차이의 근소한 승리에다 여소야대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야당 대표를 만나지도 않았다. 여당의 대표를 잇따라 쫓아냈다.
뉴욕타임스 기자 매기 헤이버먼의 지적대로 트럼프는 통치보다 권력과 추앙을 갈망했는데, 윤 대통령도 그랬다. 트럼프 대통령은 재임 기간 성과도 내지 못했다. “선거운동 기간 공언한 것과는 달리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건강보험 업적인 오바마케어를 폐지하지 못했고, 핵심 공약으로 전면에 내세웠던 멕시코와의 국경 장벽 설치도 원래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김유진·강인선, ‘트럼프의 공화당 장악’) 코로나19 대응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선거에서도 성적이 엉망이었다. 취임 2년 뒤 치른 중간선거에서 대패했다. 본인 재선도 실패했다.
윤 대통령도 이렇다 할 업적이 없다. 의료개혁은 개혁이라 부를 수 있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그조차도 혼란만 낳고 있다. 민생경제는 그야말로 바닥이다. 그럼에도 긴축재정으로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피폐화된 삶을 방치하고 있다. 공정과 상식을 표방했으나 불공정과 몰상식의 동의어가 됐다. 자신의 부인에게 닥친 사법리스크를 방어하느라 대통령 권력을 사유화했다. 집권 2년 뒤 치러진 총선에서 그는 무참히 졌다.
트럼프는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두번 탄핵소추 당했다. 비록 상원에서 다 기각되긴 했지만 4년 재임 중 두차례나 탄핵 위기에 직면할 정도로 나쁜 대통령이었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2024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한 ‘카키스토크라시’(kakistocracy·가장 저열한 인물에 의한 통치)의 전범이다. 퇴임 뒤에는 91개 범죄 혐의로 기소되거나 재판을 받고 있다. 특히 성추문 입막음 사건의 34개 중범죄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평결까지 받았다. 그럼에도 굳건히 살아남아 공화당의 후보직을 가볍게 따냈고, 본선에선 박빙 승부라는 예측을 비웃으며 완벽하게 승리했다.
이런 트럼프, 사법리스크에 탄핵마저 닥쳐도 변함없는 ‘내 멋대로’의 권위주의 리더십, 낙제 수준의 성적표, 본인의 저열함에다 능력이 떨어지는 C급 측근이나 철 지난 인사들을 중용하는 정실인사까지 윤 대통령이 생각하기에 자기와 닮아도 너무 닮은 트럼프의 재기 드라마는 그에게 감동과 용기를 주기에 충분했다. 트럼프처럼 윤 대통령 자신도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다고 마인드 컨트롤하고 있을 게다.
지금부터 윤 대통령이 보여줄 모습은 크게 2가지다. 하나는, 트럼프의 마가(MAGA) 운동을 벤치마킹해 예컨대 본인이 입에 달고 사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표방하는 식의 시민정치 운동을 주창·전개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과정에서 법률적으로 대응하는 한편, 어쩌면 윤 대통령이 극우 집회에 참석해 이념적 깃발을 높이 들고 진영대결을 부추기는 행위를 보게 될 수도 있다. 반격은 이미 시작됐다. 빌 클린턴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부인 힐러리가 탄핵을 우익의 거대한 음모라고 했듯이 자신에 대한 탄핵을 음모론으로 역공하고, ‘광란의 칼춤’ 운운하며 당파적 대결의 프레임을 작동시키려 한다.
그런데 마가 운동은 백인 인종주의와 경제적 고통으로 인해 저학력 노동자들이 민주당에 갖게 된 배신감이 주된 동력이다. 윤 대통령이 어떤 이념이나 가치를 운동의 명분으로 내세우더라도 이를 뒷받침할 사회경제적 기반이 없다. 양 진영 간의 정서적 양극화, 더 좁게는 태극기 부대의 감성적 지지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어떤 근사한 이름을 붙이든, 어떤 황당한 논리로 적개심을 부추기든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세력은 그리 크지 않다.
다른 하나는, 국민의힘과의 굳건한 동맹이다. 트럼프가 공화당을 ‘트럼프화’했듯이 윤 대통령이 국민의힘을 온전히 ‘윤석열화’하긴 무리다. 허나 정당의 전폭적 지원 없이 법정과 길거리에서만 싸우는 건 역부족이기에 단단한 공조는 꼭 필요하고 충분히 가능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2021년 1월 ‘반란 선동’ 사유로 탄핵됐다. 하원에서 232대 197로 가결될 때 공화당 의원 10명이 찬성에 동참했다. 전직 대통령 트럼프는 이들 ‘탄핵 10인’을 2022년 중간선거에서 대부분 퇴출시켰다. 10명 중 4명은 트럼프 진영에 의한 압박 때문에 불출마했고, 출마한 나머지 6명 중 4명은 트럼프가 공개 지지한 경쟁자들에게 패했다.
반대자에 대한 축출은 트럼프 재임 중에도 있었다. 2020년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소속 연방 하원의원 41명이 불출마를 선언했다. 전례 없이 많은 숫자였다. 그 압박이 얼마나 심했던지 2020년 대선 결과에 대한 불복 소송에 공화당 하원의원 126명과 상원의원 7명이 지지를 표명했다. 2021년 1월6일의 대선 결과 인증 투표에서도 하원의원 138명과 상원의원 8명이 바이든 승리에 대한 인준을 반대했다. 이 투표 직전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사당에 몰려와 폭력을 행사해 생명의 위협을 직접 겪었으면서도 그들은 트럼프를 따랐다.
불법 계엄으로 인한 위협과 혼란을 생방송으로 지켜보고서도 계엄 철회 표결에 참여해 동의한 국민의힘 의원들은 고작 18명이었다. 군 장성들의 잇따른 고백으로 비상계엄의 무도함과 불법성이 확인됨에도 탄핵에 찬성한 국민의힘 의원은 12명에 불과했다. 미국 공화당 의원들이 보여준 행태와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보수정당은 헌법 수호보다 당파적 이익과 공범의식으로 뭉쳤다. 이제 국민의힘은 이들 ‘탄핵 12인’을 솎아내고, ‘반 이재명’을 명분으로 윤 대통령과 단일대오를 형성할 것이다.
윤 대통령은 생존을 위해, 국민의힘은 대선을 위해 손잡고 극적인 반전과 부활을 열심히 도모하고 있다. 그래서 이재명 대표에 대한 비호감 정서에 기대고, 공포 마케팅으로 이를 열심히 부추긴다. 지난 12월10~12일 실시된 한국갤럽의 지지율 조사에서 윤 대통령은 11%, 국민의힘은 24% 불과했다. 이런 여론구도에서 이들의 전략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이철희 |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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